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짠 Jun 07. 2022

뜻밖에 우리

1. 즐겨. 네 인상이 쫙 펴지게 즐기라고.

즐겨. 네 인상이 쫙 펴지게 즐기라고. 성아는 선심 쓰듯 말한다. 전화기 너머 그녀의 표정이 떠오른다. 입술을 슬쩍 앞으로 내밀고 있으리라. 초점 없는 눈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손가락은 말을 하면서도 화투장을 뒤집기 위해 마우스 위를 덫에 걸린 쥐처럼 바둥거리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녀의 제안은 좋은 것이라 해도 텅 빈 눈만큼이나 아무 의미도 없는 친절이다.    

 

 토요일 오후 3시 45분.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 대신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172번째일까? 그녀에게 불필요한 일을 대신해 왔다. 대리 친구라고나 할까. 대리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다.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오늘처럼 은밀하고 럭셔리한 모임에 대리 참석할 수도 있으니 괜찮은 거래다. 평소 같으면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을 시간을 낯선 남자를 만나러 가는 설렘과 바꿨으니 나쁘지 않다. 기회를 얻은 것 아닌가. 금요일마다 술로 위장을 소독해야 한 주간의 스트레스가 소멸할 것 같이 술을 들이붓는데, 내 주량은 고작 7잔이다. 그 후로는 술이 나를 지배한다. 그러니 토요일은 인간이라기보다 인간으로 돌아오기 위해 술을 몸에서 빼내는 날이다. 그런 좀비의 날, 인간으로 분장하고 서울에 가고 있다. 즐기러.     


 토요일 저녁 7시 12분. 음악 소리와 말소리가 서로 경쟁하듯 윙윙거렸다. 낯선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돼있고 치장한 옷보다 더 화려하게 표정을 꾸미고 있다. 20평 남짓의 파티 룸은 샹젤리제와 노랑, 파랑, 빨강 소파들로 고급스러움과 세련된 감각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오히려 중저가 예식장에서 느꼈던 가짜 고급스러움을 떠올렸다. 테이블마다 꽃 대신 화려한 과일 안주가 놓여있었다.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안주를 먹으며 낄낄거렸다. 현란한 조명이 비칠 때마다 테이블 위의 술병이 번쩍거렸다. 제대로가 아닌 그런 척하는 인테리어. 이런 정도의 공간을 모임 장소로 대여한 수준이라면 여기 모인 사람들도 뻔하다. 그럼 오늘 즐겨서는 안 된다.      


또 당했다. 성아는 좋은 건 주지 않는다. 좋다가 말 것만 준다. 그런데도 매번 그녀의 제안을 친절이라고 자신을 속이며 받아들인다. 처음 그녀 집에 놀러 갔을 때, 욕실을 본 순간, 이 애랑 친구가 돼야겠어. 나도 이런 집에 살고 싶어.라고 다짐한 순간 그녀와 나의 불균형한 관계는 결정된 건지도 모른다. 금으로 된 세면기가 그녀도 금으로 된 사람으로 내 안에 각인됐나 보다.

어른이 된 후에 금이 아니라 금도금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녀의 친절이 우정이 아니라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치장이라는 걸 알게 됐지만, 여전히 금도금 세면대조차 못 갖춘 우리 집 사정은 여전했으니까. 가짜도 급이 있으니까.    

  

 그럴듯하다. 그럴듯하게 꾸민 공간에서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서로를 탐색한다. 하룻밤 연인이 되던, 운명적 만남이 되든 아무튼 인연을 만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동갑 모임이라고 우정을 위한 행사라고 그럴듯하게 치장했지만, 우정은 이미 고등학교 졸업하며 마감된 관계 아닐까? 우호적인 관계라면 몰라도 우정까지 내세우는 건 아니다. 사회자인지 모임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룸 정면에 자리한 무대 비슷한 단상에 올라가서 다 함께 건배하자고 제안했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오늘 밤을 위하여!’


 몇 잔을 기울이자 서로 입이 트이기 시작했다. 서로의 직업을 탐색하며 공통 화제를 찾았다. 리더의 사회로 한 명씩 나와서 자기소개하고 노래도 돌아가며 불렀다. 어쩌면 진짜 우정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계심이 녹아들 무렵 다 같이 무대 앞으로 모여 손뼉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구석에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말쑥한 차림 사이에서 티셔츠를 대충 입고 벨트를 찬 모습이 건달처럼 보였다. 얼굴도 옛날 사람 같았다. 이 모임이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차림새였다. 즐기진 못해도 신나게 놀기라도 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자꾸 그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이 어울리지 않는 반응은? 뇌는 불쾌한데 심장은 두근거려. 자꾸만 시선을 훔쳐 가. 그 남자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주술이라도 걸지 않고서야 저런 스타일에 끌릴 이유가 없다. 이건 내가 계획한 일이 아니야. 장르가 다르다고.


- '뜻밖에 우리' 소설은 이주 뒤에 이어집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단짠 노트'는 두 째, 네째 화요일 아침에 배달합니다. 지금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이 도착할 거예요.
'단짠 스토리'는 첫 째, 세 째 화요일 밤에 발행합니다. 당신과 다른, 당신을 닮은 이야기가 도착할 거예요.
화요일마다 글 도시락을 배달합니다. 응원해 주세요~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짠^^


매거진의 이전글 전 남자친구가 청첩장을 보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