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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Oct 15. 2021

너와 나 사이의 공식

37-23 = 0. 그럴 거야라는 괴물이 삼켜버린 사이

“처음 날 봤을 때 어땠어?”

“음.... 수준 있어 보였어.”

“마음에 들었다는 거야?”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인정했다.

말을 아꼈다.

연거푸 커피를 마시며 말보다 깊은 기억으로 숨어들었다.


나에게 너의 처음은.

네가 입은 하늘색 셔츠와 돌돌 말아서 들고 있던 코스모폴리탄 잡지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망토와 그가 전쟁에서도 읽었다던 호메로스의 시집 같아 보였어. 마치 이 세상 모든 남자가 하늘색 셔츠와 코스모폴리탄 잡지를 갖고 있지 않아서 사랑스럽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야. 아니, 그 표현보단 이게 더 맞겠다. 네가 남자의 완성으로 보였어.

또는

이상적인 대학생 같았어. 내가 있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어. 그러니까 정원 있는 이층 집에 살며 피아노를 잘 치고 허리가 가녀린 긴 머리 여인과 홍차를 마실 것 같았지. 그래서 쳇, 소개팅은 망친 듯. 이렇게 생각했어.


이런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실체에 비해 지나치게 거창했던 그의 첫 존재감. 그리고 나를 좋아할 리 없다는 자격지심이 그가 나에게 준 첫 감정이란 걸.

첫눈에 반할 수는 있지만, 가난한 마음마저 들킬 수는 없었다. 그를 처음 본 날의 내 마음은 그때도 지금도 그와 공유할 수 없는 일급비밀이다.


침묵이 길었나 보다. 불편했는지 톡톡톡. 그가 탁자를 두드린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데, 찰칵.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카메라로 대책 없이 나를 찍었다.


“뭐야? 갑자기 찍으면 어떡해?”


따져 묻는데도 그는 신경 안 쓰고 턱으로 커피잔을 가리킨다.


"커피만 마실 거야? 넌 여전히 무언가 생각하느라 바쁘구나. 전에도 늘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느라 날 심심하게 했어."


커피는 연거푸 마셔도 커피 맛일 뿐이다. 그래도 자꾸 홀짝거리는 건 그것밖에 할 게 없는 어색함 때문이다. 그런 건 눈치채지도 못하면서 사진 찍는다는 말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다니! 불쾌했다. 갑자기 누른 카메라 버튼 속도만큼 깊게 찌푸린 인상이 사진에 담겼겠지? 그의 카메라는 여전히 싹수가 없다.


"사진 보여 줘."


그는 또 말이 아닌 고개로 답했다. 좌로 우로 고개를 돌려대면서 입술은 왜 삐죽 내미는 걸까? 그 모양새가 미운 오리 같았다.


"안 보여 준다고? 웬 거절? 내 사진 갖고 네가 왜? 사진기만 네 거지 내가 찍힌 사진은 내 거야."


어이가 없어 쏘아붙였지만 안 보여 주는 이유를 따져 묻기도 귀찮았다. 사진은 안 보여줘도 좋지만,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으면 지워달라고 하려다 그만둔다.

그가 사진기 속 사진을 요리조리 살피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좌로 우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이 '사진은 보여 주지도 지우지도 않을 거야!'라는 신호로 보였기 때문이다. 삼 년을 사귄 사이라고 아직도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니. 그가 나를 잊는 것만큼이나 불쾌한 사실이다. 사랑이 끝났는데도 있었던 일은 좀처럼 없었던 일이 되질 못 한다니. 쓰다가 고장 난 액자는 버리면 그만인데,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게 뭐라고 기억이란 특수장치의 혜택을 받는가 말이다. 내가 조정할 수 없는 기억이란 장치의 선별기준이 불편하다.


침묵하는  사이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말풍선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는 여전히 사진기를 만지작거릴 뿐이다. 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볼뿐이다. 그러다 지친 내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어쩐 일이야?”

“근처에 사진 찍으러 오게 돼서.”

“여전하구나.”


여전하다는 말엔 다른 두 감정이 있다. '14년이 지나도 나를 기억하고 찾아오다니. 넌 역시 날 사랑했어.'라고 감동의 박수를 보내는 것과 '나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고, 근처에 왔다가 들렸다니. 역시, 넌 그때와 달라진 게 없구나. 그때도 나보다 중요한 게 많더니. 넌 또 내게 상처를 주는구나.'라는 실망을 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감정은 두 가지지만 하나로 정리할 수 있다. 넌, 여전히 날 실망시켜.




처음부터, 그가 나보다 중요한 게 많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나에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니다.

그와 나의 처음은 피터 팬의 밤 비행처럼 신나고, 환상적이었다.


이상적인 대학생인 그와 평범한 나.

피아노를 잘 치는 여자를 만나고 싶던 그와 피아노를 못 치는 나.

깊고 구체적으로 아는 그와 얕고 두리뭉실하게 아는 나.

서로 다른 우리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개팅 5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덥석 커피잔을 만지는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우리 사귀자."


반짝거리는 눈이 블랙홀처럼 강렬하단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렇게 자격지심을 일깨운 첫인상과 달리 소개팅은 사랑으로 골인했다.

사랑은 언제나 눈부시게 시작한다.

그와 걷는 거리는 수십만 개의 조명으로 밝혀 놓은 듯 찬란했고 그와 있을 땐 구름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첫인상에서 느낀 대로 이상적인 그의 이상형과 나는 달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고 사랑과 이해 사이에 생긴 빈틈은 점점 커졌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그와 나 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그럴 거야'란 괴물이 차지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잦아지면서 대화를 멈추고 짐작만으로 서로를 대하곤 했기 때문이다.


'오늘 눈 오는데 데이트하자고 할까? 아냐. 사진 촬영 가느라 바쁠 거야. 그럴 거야.' 나는 그를.

'이번 주말에 서울 오라고 할까? 아냐. 또 친구들과 약속 있을 거야. 그럴 거야.' 그는 나를.

이해 못 하는 서로의 행동만큼 실체 없는 짐작만 커갔다.

그러다가

'이젠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럴 거야.'

나도 그도 같은 짐작을 했고 그래서 헤어졌다.

나에게 그는 나보다 중요한 할 일이 많은 남자였고, 그에게 나는 그 보다 만날 사람이 많은 여자였다.


사진 촬영을 하러 가기 전에 잠깐 시간 내서 데이트하는 그가 싫었다. 그래서 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14년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한다니. 괘씸하다. '내 인생에 그런 연애도 해봤어.'로만 존재해야 할 과거 속 인물이 빈손보다 얄미운 빈 마음으로 '그냥 지나가다 들렸어.'라고 떠들다니.


그냥 지나가지. 뭐하러.


“근처에 사진 찍으러 오는 길에.”

그의 대답이 버퍼링 걸린 노랫말처럼 불협화음으로 귓가에 맴돌았다.


14년 만에 갑자기 다시 찾아온 그를 덥석 만난 내 선택이 민망해졌다.

나를 만나기 위해 다른 도시까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진 촬영을 왔는데 근처에 내가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것뿐인 줄도 모르고 전화 한 통에 여기까지 나오다니.

무엇을 기대한 건 아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웠고 마침 시간이 있어서 나왔지만, 우린 그냥 만날 사이는 아니라서 정체 모를 설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무심한 대답에 카페 안은 흑백사진으로 변해버렸고 재회의 순간은 모든 낭만의 빌런돼버렸. 친구 사이는 헤어져도 다시 만나 시시덕거릴 수 있지만, 연인 사이는 그럴 수 없다. 다시 만날 땐 두 가지 중의 하나는 할 의무가 있는 사이가 연인 사이이다. 추억을 아른하게 곱씹거나 다시 시작하거나.


잠깐이라도 우리가 사랑했던 23살, 피터 팬과 웬디의 눈부신 모험을 떠올렸다니. 바보 같다.

나는 또 사실과 다른 짐작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 생긴 '그럴 거야'라는 짐작의 공식을 깨뜨릴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 못 해서 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을 뿐이다. 14년 만에 찾아온 그의 여전한 한 마디에 우리의 사랑이 끝나야 했던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서로의 신화가 되고 싶어 했을 뿐, 서로의 일상 속 연인이 되지 못했다.


이 모든 감정을 담아 그의 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응, 이제 너와 내가 사랑한 이유도 헤어진 이유도 알겠어. 너와 난 사는 곳이 다른 게 아니라 보는 곳이 달랐어. 넌 너만 보고 난 나만 본 거야. 우리가 서로를 본 적이 있을까? 내 근처에서 사진 촬영 잘하고 너의 세상으로 돌아가서 잘 지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는데 여전히 아무 말도 안 하고 고개만 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그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그토록 빛났던 눈. 그리고 흔들리는 마지막 눈.


처음 그대로 반짝임으로 기억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오늘의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곧 야간 사진 촬영지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카페 문을 닫고 나오니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진 않았다. 집까지 걸어가도 좋은 시간이었다.

“혼자 걷기 딱 좋은 시간인걸.”


그와 나의 처음은 피터 팬의 밤 비행처럼 신나고, 환상적이었는데, 그와의 마지막은 그냥 밤일뿐이다.


-  끝 -  단짠 스토리는 소설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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