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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짠 Nov 22. 2022

내겐 너무 달달한 새끼

3. 기억의 향 / 4. 여섯 개의 다른 의자

뇌가 기억하는 게 아니다. 나의 심장이 기억하는 것이리라.  

살면서 남겨진 기억 중 어떤 것은 무의식 저편까지 침투해버려서 의지나 새로운 상황들로도 흐릿해지지 않는다. 시간도 사라짐 법칙 속으로 기억을 끌고 가지 못한다. 그 어떤 힘도 어쩌지 못한다. 마치 각인된 표식처럼 인생에 그 기억의 흔적을 남긴다. 그런 흔적은 대체로 비극의 파편이다.


박하 향이 내겐 그랬다. 그리움과 서러움이 한 움큼 가슴으로 달려들어서 나를 물어뜯는 야수가 되게 하는 향이다.

"그런데 그 향이 왜 여기서?'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가슴팍에 달린 새 모양 브로치를 보는 순간, 야수는 사라지고 다정한 설렘이 느껴다. 희미했지만 분명 그때 감정은 반전을 일으켰다. 어두운 골목길에 갑자기 가로등 불이 켜지듯이.


"리나 씨 친구 루나 씨죠?"

그는 자기 가슴팍에 고개를 부딪치고 살짝 흔들리던 내 몸을 붙잡기 위해 내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네, 제 이름을 아세요? 이 방이 궁금해서 들어왔어요. 누가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의 영역을 방해한 것을 변명하듯 빠른 어조로 말했다.


"별말씀을. 리나 씨 사진이 전시돼 있어요. 둘러보세요. 이 중엔 제 사진도 있습니다."


슬쩍 둘러만 봐도 방 안엔 거실에 있는 사진들처럼 키스하는 연인 사진과 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사진이 벽과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액자에 감싸여 예의를 갖추고.


그는 나가려던 길 같은 데 방안에 머물렀다. 내 뒤에 머물며 마치 사진 대충 보지 말라고 주의를 주듯 서 있었다. 그래서 대충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액자 가까이 가져갔다가 한 발 뒤로 물러서 전체 사진을 보는 듯 연기를 했다.

'왜 키스 사진이지? 게다가 리나랑 어울리지 않는 풍경 사진은 뭐야?'

하는 의문뿐이었지만, 마치 작품 감상을 하듯 찬찬히 사진을 보는 척했다.


"어떤 사진이죠? 이름이 어떻게?"

"전 마 우진입니다. 리나 씨와 사진 동호회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진 동호회요? 리나가 사진을 찍는 줄 몰랐어요. 우진 씨 작품은 어떤 거죠?"

"찾아보세요. 하하."


자신이 찍은 사진을 찾아보라는 말이 무례하게 느껴졌지만, 그의 향이 박하 향 비슷하지만 다른 향이란 걸 느끼기 시작하면서 경계가 풀렸기 때문에 순순히 그의 사진을 찾아봤다. 풍경 사진 속에 유독 건물이 중심이 된 사진이 두 점 보였다.


"이 사진인가요?"

그중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건물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든요."


.......................................

4.


"루나 빨리 와. 언제까지 우릴 기다리게 할 거야?"


마치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나를 편하게 대하는 리나가 싫었지만, 나는 리나의 초대를 받고 이곳에 왔으니 그녀의 말을 따라줘야 했다. 그와 나는 리나의 목소리를 따라 사진으로 가득한 방을 나와 낯선 사람들과 낯선 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앨리스의 비밀 정원에서 가져왔을 것 같은 탁자와 의자 액자가 제멋대로 놓인 거실을 특별한 전시장같이 보이게 했다. 여섯 개의 의자는 색도 모양도 다 달랐다. 오만과 편견 영화에서 봤을 듯한 고풍스러운 의자에서 라탄으로 된 의자까지 통일성은 없었지만 하나 같이 멋스러웠다. 타원형 원목 탁자는 손으로 쓰다듬으면 손가락 끝에 커피 향이 묻을 것 같은 짙은 갈색이었다. 그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빛나게 할 듯 윤기가 흘렀다. 방금 오일을 바른 듯 반들거렸다. 그래서일까 탁자 위에 놓인 와인 잔은 조명을  듯 반짝거렸고 치즈와 올리브로 장식한 초록 네 잎 클로버 모양 접시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았다. 사람이 아닌 가구와 접시가 나를 설레게 했다. 오늘 밤이 크리스마스 파티라도 되는 듯이.


 리나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나. 그런 나와는 달리 리나와 그녀의 초대 손님들은 유쾌해 보였다. 한 여자분이 유독 쌀쌀맞은 태도인 것만 빼면 평범한 동창 모임과 다르지 않았다


"우린 애칭으로만 불러야 하는 거 알죠? 나이, 직업 뭐 이런 거 물으면 반칙이야. 여기선 그냥 존재하는 생명체 자체로만 머물다 가세요."


반말과 존칭을 섞어서 말하다니. 도통 마음에 안 들었다. 리나와 난 별한 친구였는데, 그저 낯선 이 사람들 속에 끼워 넣은 것부터가 예의 없다. 그러나 리나보다 우진이란 남자가 궁금해져서 표정은 굳어있어도 눈길은 기대감으로 변해갔다. 사람이 궁금해지는 건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며 생기는 첫 반응일지도 모른다. 기대라는 반가운 신호가 심장을 두드렸기 때문 테니까. 게다가 내 옆에 앉아 있는 그에게선 박하 향을 품었지만, 그 향 보단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아버지와는 다른 향이다.


24시. 자정에 시작한 파티는 서로의 애칭을 소개하고 와인과 맥주가 뒤섞이며 동년배끼리 모인 자리답게 편안하게 흘러갔다. 술이 섞이듯 대화의 주제도 이리 저리로 섞였지만, 주로 리나가 대화를 리드했다. 리나와  마 씨 그리고 제이슨은 사진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였고 제이슨 옆에 앉은 사라는 제이슨과 연인 사이였다. 놀라운 사실은 리나와 맞은편에 앉아 타원형 테이블의 다른 원 부분을 차지한 리본이 제이슨의 전 부인이었다. 이건 무슨 조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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