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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떼마마 Nov 12. 2020

엄마가 익어서 하늘나라 가면 세월이 흘러도 못 와?  

내 삶의 체리향기를 찾아서 

무너진 나를 세우기 위한 두 번째 방법



(파랑이) 엄마, 엄마가 익어서 하늘나라 가면 세월이 흘러도 못 와? 

(나) 응응?? 

(파랑이) 엄마가 하늘나라 가면 영영 안오냐구! 내가 몇 달을 기다리고 세월이 흘러도 안오냐구! 

(나) ... 

(나) 음... 파랑아... 엄마도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나이가 들거나 아주 큰 병에 걸려서 많이 아프게 되면 하늘나라로 가야겠지. 물론 하늘나라로 가게 되면 돌아올 수 없어. 파랑이는 그게 마음이 아픈 거지? 

그런데 파랑아, 걱정 마! 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되려면 엄청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해. 파랑이랑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많아. 그리고 엄마 근육 봐봐. 엄청 튼튼해? 안 튼튼해? 

(파랑이) 튼튼해..(배시시) 

(나) 엄마는 원이랑 평생 찰떡처럼 딱 붙어 있을 건데? 

엄마가 약속했는데! 파랑이가 엄마처럼 어른이 될 때까지

엄마는 파랑이 뒤에서 있을 거라고 

(파랑이) 엄마아~~~ (와락) 


5살이 되면서 딸아이는 종종 내게 하늘나라(죽음)에 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이틀 내내 손님들의 신발을 정리하던 딸아이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짐작으로는 하늘나라에 가는 순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저 높은 곳에 함께 가야 할 사람 

그대뿐입니다 임영웅 <바램> 


코로나가 터지고 대구에서 신천지 교회 관련 이슈로 거리가 적막할 때 우리 집은 저녁마다 미스터트롯의 노래와 치킨으로 버텼다. 임영웅 씨의 엄청난 팬인 엄마가 하루 종일 노래를 틀어놓고 영상을 보고 또 보는 바람에 어린이집을 못 가던 아이는 할머니와 열심히 트로트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는지 아이의 입에서 구수한 가사가 흘러나왔다. "엄마, 할머니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거야! " 아이는 인간의 나이 듦을 그때부터 익어간다는 예쁜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쪼꼬만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깔깔 웃으며 아이의 노래에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며칠 전 나의 익어감에 대해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고 나니 그저 웃고 지나갈 일이 아니었다. 


(파랑이) 엄마, 엄마가 익어서
하늘나라 가면 세월이 흘러도 못 와? 



인문학의 3대 과제라고 하는 '죽음'에 관한 질문을 겨우 다섯 살이 된 내 딸에게 들을 줄이야...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속이 뜨끔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헬렌 켈러가 이야기를 했지만 요즘 나의 기분은 사방의 모든 문들이 닫힌 기분이었다. 올드보이의 최민식처럼 쇠젓가락으로 탈출을 위한 구멍을 파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누군가가 발로 휙~ 걷어차버린 무력감에 빠졌었다. 현재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좌절감은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빈번하게 끌어당겼다. 도대체 전업주부로 어떻게 살았을까 싶을 만큼 일에 대한 상실감으로 방황할 무렵 아이가 죽고 싶다는 나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뼈 때리는 질문을 했다. 


(파랑이) 엄마도 할머니처럼 돼서 하늘나라 가면 엄마 이제 영영 못 오냐고! 


아이의 다그치는 눈물엔 걱정과 슬픔과 불안과 화가 잔뜩 섞여있었다. '언젠가는'이 될 이별에 대해 아이는 우리 사이에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가득했다. 본능적으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떨리는 등을 쓸어내려주었다. 엄마의 부재에 대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은 아이의 불안을 덜어내며 오래오래 함께 하겠노라 약속했다. 






아, 잊고 있었다. 나는 엄마다. 
파랑이의 엄마
파랑이가 엄마로 부르는 사람


과거와 미래만을 오가는 열차에서 울부짖는 나에게 파랑이가 승강장에서 손짓했다.


" 엄마, 여기야 여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야!
내가 여기 있다구!
엄마가 내려야 할 역은 현재야 현재!" 


한 때 아이가 사랑스러워 내 인생에서 받아야 할 모든 복이 아이를 통해서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혼생활로도, 일로도, 경제적으로도 모든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거릴 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만큼은 영혼까지 끌어와 마음의 여유를 대출받아 아이에게 나누어주던 날들이 있었다. 불안한 결혼생활에 비해서 아이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말도 참 많고 에너지도 하루 종일 넘쳐서 1년에 2-3번 크게 감기를 앓을 때를 제외하고는 징징거리는 일도 없었다. 이 아이를 보고만 있어도 없던 에너지가 심폐소생이 되는 기분이라 마치 내게 선물처럼 아이가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들은 아파 보이고 힘이 없어 보이는 부모에게는 저항하지 않는다고 한다. 적어도 아이가 마음 놓고 떼쓰고 저항하는 건강하고 활기 있는 엄마가 되는 것이 아이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렇게 아이의 아빠와 기러기 부부로 사는 몇 년 동안 나는 아이에게 기대어 간신히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이번에도 내 앞의 생을 알아차릴 신호를 어김없이 준다. 




일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 늘었다. 가장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집안의 일들에 붙잡혀 있으면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다시 또 애 아빠의 생활비에 온전히 기대어 살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언젠가 마주할 부부싸움에서 또 을이 될지도 모른다. 내 두려움의 실체는 만약에 있을 남편의 '갑질'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일반적인 여성들은 느끼지 못할 감정일지 모르지만 때때로 불합리한 상황이 오면 나도 참지 않고 할 말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독립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배경도 그래서 내가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이 된 이유도 속 시원하게 할 말은 하고 살기 위한 내가 되고 싶어서였다. 더 많이 벌고 싶어서 퇴사를 했는데 지금은 한 달에 고작 커피값 정도 벌고 있으니 화 딱 질이 났다. 2주 정도 속앓이를 하며 걷고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며 모호했던 두려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 


아! 내 두려움의 실체는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내가 느낄 무력함이구나.

에라이, 모르겠다.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할 일이나 하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며 마트로 가서 장을 봤다. 


오늘 저녁에는 짜장밥을 만들고 호박전을 굽자. 

신선해 보이는 다진 쇠고기, 브로콜리, 감자, 달걀, 양송이버섯, 호박을 담았다. 다지기 대신 손수 야채들을 탁탁탁 탁 소리 내며 다져보고 팬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정성스레 볶고 짜장 소스를 넣어 휘휘 저었다. 지글지글 호박전을 노릇노릇 구웠다. 오랜만에 내가 손수 만든 음식을 먹는 아이는 양손에 엄지 척을 보이며 나의 수고로움에 몇 배나 되는 리액션을 보여줬다. 이 일도 내 역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오손도손 앉아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식사시간 동안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었다. 


언제나 지금에 초점을 맞추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나머지는 나의 영역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은 그냥 과거에 내버려 두어야 한다. 대신 돌이킬 수 있는 과거의 생각은 부정을 긍정으로 바꿈으로써 아픔과 고통을 덜어내어야 한다. 그리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두되, 막연한 걱정이 아닌 준비를 하면 된다. 과거와 미래의 부정적 생각들을 털어낸 그 자리에 오롯이 현재를 채워 넣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오늘을 살 수 있다. 
모든 여행이 멋지게 날아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추락해야만 비로소 시작되는 아름다운 여행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은 처참하고 희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생애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의 뇌가 만들어낸 절망일 뿐,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출처 - 남편이 자살했다(곽경희)


출처 - 죽은 시인의 사회 



"Here & Now"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외쳐야 한다. 안 그러면 우리는 수시로 과거와 미래를 오가느라 현재를 놓치게 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놓치고, 지금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다.

출처 - 남편이 자살했다(곽경희)


그는 거의 빈털터리였지만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만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 영화를 제작했다. 거북이, 개, 술집, 목장, 버스만을 활용해서 스텝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맘껏 자유를 누렸다. 변명은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했다. 그런 영화를 뜻밖에 콜롬비아 영화사가 배급권을 사들였고 선댄스라는 영화상까지 받게 되었다. 

출처- 타이탄의 도구들(팀 페리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방법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이 순간에 내가 나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신사임당 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클릭을 유도하는 썸네일이 눈에 들어왔다. 


"삶이 엉망진창으로 느껴질 때" 

일단 내 문제가 무엇인지 다 적어보며 메타인지를 하는 것이 중요해요!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내 위치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래서 내가 내 상황을 스스로 까지를 못합니다.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적어보세요! 고철덩어리에서 연계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탈탈탈 털어서 쓰세요. 내 능력이나 커리어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넘어졌다면 돌멩이, 흙이라도 갖고 일어나야 합니다.

출처 - 신사임당 유튜브 




교육과정 개발해서 OOOO에 제안서 넣기 

브런치에 글쓰기 / 출판사에 투고하기

OO분야의 사람들을 30명 인터뷰해서 매거진을 발행해보기 

파랑이와 함께 즐겁게 감정 놀이했던 나만의 노하우를 문서로 만들어 네이버 블로그/인스타에 올리기 

셀프 워크숍 툴킷 개발해서 OOOOO에 제안하기 


아주 사소한 것 까지 적으면 30개도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삶의 체리향기를 찾는 일은 내 위치를 알게 했다. 도로교통공단 도로연수, 주행 기능강사님들께 서비스 교육을 하며 이야기를 했던 내용이 생각이 났다. 


" 운전자가 네비게이션을 보고도 길을 잃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계속 네비에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는 경고 메시지가 나오면 초보운전자들은 아주 당황을 합니다. 계속 같은 길을 맴도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유는 지금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내 삶에도 잘 익은 체리가 꽤 열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는 그 향을 따라서 체리들이 열린 자리를 하나하나 찾아본다. 어떤 체리는 익다가 말았고 어떤 체리는 떨어질까 위태위태 하다. 또 어떤 체리는 익지 않아서 떫고 시큼하다. 하지만 계속 향기를 따라가다 보면 너무나 달큼한 맛이 나는 열매를 발견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파랑이의 엄지척을 부르는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일 또한 내가 가진 체리 중 일부이고 그 체리의 맛이 이토록 달콤할지 아닐지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던 나를 반성해본다. 넘어지면 흙이나 돌멩이라도 잡고 일어나라는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돈다. 정말 안되면 __________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했다. 


나에게 없는 열매를 찾고 이미 떨어진 체리를 돌아보느라 지금 내 가지에서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체리를 보지 못했다. 흔하고 사소해 보이지만 먹어보면 혹시 모를 달달한 나의 체리를 살펴보며 오늘도 나를 세운다. 


오늘도 나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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