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떼마마 May 13. 2021

자기역사연표 만들기를 위한
과거기억소환

자기탐색 3-5일차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제 3자의 눈으로 보신적이 있나요? 

오늘은 자기탐색 3-5일차의 날로 내 삶의 자기역사연표를 작성하며 각 시기별로 느낀 삶의 만족도와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통찰을 얻고 내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갖기위한 것임을 생각했을 때 돌이켜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힘이 없고... 과거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을 딛고 일어서려면 내 행동의 공통된 패턴을 면밀하게 들여다보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주 중요한 과정인것 같아요. 


 

오늘의 가이드

당신의 삶에서 주요한 에피소드 5개를 적어주세요.   

오늘부터 우리는 3일에 걸쳐 자기역사연표를 만듭니다.

생각나는 대로 5~15개의 에피소드를 써보세요. 반드시 숫자를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차분히 할수 있는 만큼 채워가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으니 시간을 잘 배분해 매일 조금씩 과거의 기억을 수집해 주세요. 



<나의 자기역사연표작성과정>

(1) 삶의 주요 에피소드 25개를 작성하면서 만족도와 당시 느낀 감정을 마크브래킷의 무드미터를 참고로 당시 느꼈던 주된 감정을 기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그 선택이 추후 나의 일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기록했다. 

(2) 자기역사연표시트에 기록한 내용을 토대로 만족도와 감정을 색깔과 숫자로 표기하고 시기를 나누어 각 시기별로 이름을 붙였다. 

(3) 최종 분석하기 



<참고자료> 

감정의 발견, 마크브래킷



의미있는 삶을 위하여, 알렉스 룽구 



* 제가 진행하는 자기탐색은 한달어스 자기발견의 가이드를 토대로 작성하며 저에게 조금 더 적합한 방식으로 확장해서 글을쓰고 제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방법들을 시도합니다. 






내 삶의 주요 에피소드 소환하기 


 (만족도: 1~10/ 감정: 마크 브래킷 무드미터 활용) 



자기역사연표와 최종 분석 


첫번째 시기는 태초의 기억이 있었던 6세부터 24세 까지이다. 부정적인 동기부여로 인한 선택과 행동을 했던 시기로 이 시기의 이름을 나는 자아수축기라고 이름 붙였다. 초등학교 6학년 이전 까지의 나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 않았던 것 같다. 6학년때부터 학원을 다니며 친구들과 교류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완전히 나는 다른 사람으로 성장했다. 나의 가치관 형성, 관심분야에 선생님이 절대적이었다. 처음으로 경험해본 놀라운 경험, 나에 대한 긍지가 있었던 기억들은 주로 이 때의 기억이 많은데 당시에는 큰 의미와 목적보다는 단지 잘하고 싶다. 주목받고싶고 내가 무조건 1등을 해야겠다 라는 동기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대학교 때 전공을 바꾼 일, 취업을 했던 일 모두 나에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중요한 순간들이지만 행동의 계기는 모두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주중에 술을 내내 권하는 친구들을 피하고 싶어서, 졸업식날 백수인 선배가 되고싶지 않아서, 부모님을 피하고싶어서 취업에 올인을 했던 것이지 내가 하고싶은 일, 가치가 있는일에 대한 탐색은 단 한번도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나의 의지보다는 환경에 의해서 도망가거나 회피했다. 


두 번째 시기는 결혼, 출산, 대학원 진학, 퇴사, 기러기부부, 경제적 위기 등 삶의 주요이슈들이 한꺼번에 나타났던 시기다. 출산의 경험은 경이로웠고 육아를 하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일이라 삶에서 더없이 충만하고 평온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남편과 기러기부부가 되고 경제적 위기가 느닷없이 생기면서 구덩이가 깊은 절망감에 빠져서 힘든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구덩이에 빠지면서 내 인생은 완벽하게 전환되었다. 내 삶의 자기결정권을 가지는 것 그리고 아이를 키우든 취미를 가지던 일을 하던 경제적 자립 마인드는 존엄한 삶을 살기위한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크게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시기는 내 삶과 일에 대해서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나를 탐색하고 많은 기회에 도전을 하며 새로운 나를 알아가는 시기다. 돈을 벌지 않으면 정신이 무너지고 생활이 무너질 것 같아서 워킹맘의 삶을 시작했고 모든 경력을 리셋하고 바닥부터 밥벌이를 시작했다. 그 때부터 한 순간도 몸이 편안했던 적은 없었다. 기본적인 삶의 본능적인 욕구들이 충족되면서 내가 나를 더 잘 쓸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것이 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며 프리랜서가 되었다. 비대면강의, 영상촬영 등등 미션을 하나씩 끝낼 때 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으로 내 삶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시기의 이름을 자아 확장형 시기라고 붙였다. 왜냐하면 나에게 진정 의미있는 삶을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종 느낌 

긍정적인 경험들이 긍적적인 동기로 인한 결과물이 아닌 순간들도 많았고 삶에서 가장 최악의 순간부터 나의 삶이 주도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확인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경험도 나의 의지로 했던 선택과 행동이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었고 인생은 단지 감정의 좋고 나쁨으로 행복하다. 아니다를 결정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 1989년, 나의 여섯살의 기억 (만족도 2, 기죽은)

 6살 유치원 재롱잔치 준비를 위해서 4명 정도로 한팀을 만들어 친구들과 율동연습을 했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따라했던 기억을 따라가보면 아무리 가르쳐줘도 곧잘 따라하지 못하고 자꾸만 방향을 틀리고 헷갈려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는 선생님의 얼굴이 기억난다. 이해력도 느리고 빠릿빠릿 하지 못했던 나는 선생님의 답답해하는 표정에 주눅이 들고 눈치가 보였다. 그때부터였던것 같다. 나는 남들보다 어떤것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오래걸리고 느린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예체능에는 전혀 재주가 없었고 무던하고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그런 존재의 아이였다. 재롱잔치날, 흰색 타이즈를 입고 다리라인이 훤히 다 드러나보이는 복장을 하고 무대에 올라야했는데 나는 발육상태가 다른 아이들보다 좋아서 토실토실 아니 뚱뚱한 체형이라 허옇게 속살이 비칠만큼 타이즈가 늘어날대로 늘어나 여리여리한 친구들과 비교되는게 싫었다. 율동도 다 외우지 못해서 잔뜩 겁을 먹었는데 당시 나의 뚱뚱한 몸은 더 나를 주눅들게 했다. 내가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고 속상했던 기억이다. 


2. 12살, 피아노 대회에 나갔던 기억 (만족도 4, 냉담한)

피아노 학원을 몇 년 동안 다니면서 지역 아이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피아노 대회에 참가했다. 피아노에 큰 소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체르니 30번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어떤 목적이나 흥미 없이 배운 피아노였다. 하지만 지는것은 싫어서 열심히 연습했는데 함께 대회를 준비하던 다른 친구의 실력에 선생님이 칭찬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부족함을 느꼈다. 대회에 나가기 싫었지만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던것에 대한 약속은 지키고 싶어서 최대한 열심히 연습을 했다. 집에 피아노가 없어서 늦게까지 남아서 학원에서 연습을 했고 대회 당일,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쓰고 나는 처음으로 엄청난 긴장감을 느껴보았다. 내가 유년시절에 느낀 가장 긴장된 날이었던 것 같은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곡을 마무리하고 내려 온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선생님은 아쉬워하셨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애쓴 그 어린아이가 기특하고 두렵고 겁이나는 도전을 해보겠다고 한 용기가 꽤 멋있어 보인다. 


3. 초등학교 6학년에 읽은 천문학 책 (만족도 10, 기운이 넘치는) 통찰

 내 삶의 전환점은 정확히 초등학교 6학년으로 기억된다. 담임 선생님을 잘 만나서 나는 과학과 우주에 관심이 많은 소녀로 성장했다. 6학년 때 처음으로 천문학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당시에 읽었던 책의 제목이 기억난다. "별헤는 밤" 이라는 고등학생이 볼 법한 천문학에 관한 책이었는데 우리가 보는 수많은 별들이 빛으로 적게는 몇 년, 많게는 몇십년, 몇 백년 동안 가야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빛이 지구에 까지 도달하는데에 엄청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그 빛은 몇 백년 전의 빛이며 실제로 그 별은 사라졌을 수도 있다고 자세히 적힌 대목에서 어린 나에게 철학적인 쇼크를 받은 것 같다. 우주가 점점 팽창한다는데, 그럼 우주 밖에 있는 그 공간은 뭘까? 빅뱅 전의 공간은 도대체 어떻게 존재를 했던걸까? 하고 너무나 혼란스러운 질문들로  알고싶다는 생각에 천문학책을 후벼 파면서 천문학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관심은 내가 20대, 30대가 되어서도 여전해서 학창시절 내내 우주쇼가 펼쳐지는 날이면 나는 별을 보러 옥상에 올라가거나 광공해가 없는 곳을 찾아서 자리를 펴고 누워서 유성우를 관찰하는 사람이 되었고,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천문대에 가서 달사진을 찍으며 태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4. 초등학교 6학년 미술시간에 큰 주목을 받은 아이 (만족도 10, 자랑스러운) 긍지 

6학년의 나는 무조건 1등을 하고싶었고 잘 하고 싶었다. 대충하는게 싫은 성격은 이 때부터였던것 같다. 미술시간에 각자 저마다 생각한 재료와 주제로 작품을 표현하는 날이었는데 다른친구들이 흔히 쓰는 재료로 작품을 만들고싶지 않았다. 당시 샷시와 주방용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셨던 아버지께 부탁을 드려서 내가 이런 재료가 필요하고 이런 모양의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스케치를 해드렸다. 당시 간절한 나의 눈빛을 읽은 아버지는 초등학교 앞에서 나와 만나 나에게 내가 요청한 디자인대로 재료를 구해서 그것을 펜치로 구부리는 방법을 알려주셨고 미술시간에 나는 내가 상상하는 모습대로 작품을 완성했다. 문구점에서 팔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재료로 우주의 어떤 행성에 가면 이런 도시가 있을거라고 설명하는 나에게 선생님은 친구들 앞에서 나의 기를 엄청 세워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나의 완벽주의는 이 때부터 시작이었다. 


5. 발명대회를 준비했던 기억 (만족도 10, 동기 부여된) 긍지 

6학년, 담임선생님과 함께 발명 대회를 준비했다. 그 때문에. 왜?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 같다. 더 쓸모있게 만드려면 어떻게 하지? 정말 생활에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들 처음으로 몰입해서 한 첫번 째 경험이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만들고 싶어서 스케치를 하고 선생님과 샘플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상을 받고싶다고 원했고 노력하고 그에 대한 보상이 주는 기쁨을 느꼈다. 


6. 고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과 쓴 교환일기 (만족도 6, 안전한)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아버지로부터의 상처와 두려움으로 우울한 학생이었다. 공부를 하러 다녀오겠다고 집을 나서는 순간 아버지가 나의 뒤를 조용히 따라오며 내가 독서실을 다녀오는지의 여부를 확인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 내가 느낀 수치심은 이루말할 수 없었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 절망스러웠고... 늘 집에만 들어가면 눈치보게 되는 아버지 특유의 무서운 분위기가 가끔은 숨이 막혔다. 도대체 당시에 왜 그러셨을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물음표 여전히 내 몸의 구석에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을만큼 힘들었던 그때를 버틴건 담임선생님과의 대화였다. 선생님과 모든 이야기를 노트에 적으면서 처음으로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는 비밀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하며 눈물을 흘리고 선생님이 손 수 적어주신 노트를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7. 친구를 피해서 전공을 바꾼 대학교 1학년 (만족도 3, 불쾌한) 구덩이 

 과학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자연과학부 화학과로 입학을 했다. 당시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수능성적으로 기대 이하의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 나는 어떻게든 나를 증명하겠다며 장학금을 받으려고 1학년때부터 학업에 집중했다. 함께 다닌 친구들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매일 술을 권했다. 공강 시간에 학교 근처 주막촌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면 수업을 그냥 째버리자고 하기 일쑤였고 나는 그것이 너무 싫었다. 1년동안 그렇게 버티다가 이런 환경, 분위기가 싫다는 생각에 취업이 잘 된다는 공대로 전공을 옮겼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지만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이 주는 압도적인 분위기에 주눅이 들고 내가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답답한 학생이었다. 


8. 대학교 3학년, 랩실에서 연구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기억 (만족도 7, 낙관적인)

공대 1학년 과정을 배우지 못하고 2학년 전공을 바로 접하게 된 나는 고등학교때도 잘 하지 못했던 수학과의 싸움을 해야했다. 수업시간을 녹음하고 사진을 찍고 필기를 하면서 잘 정돈된 강의노트를 보신 교수님이 강의자료를 만드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셨다. 디지털 통신 과목의 필기부분을 ppt로 수식을 모두 넣어서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덕분에 랩실에서 수업시간 내용을 복습하면서 용돈벌이까지 하게 되었다. 당시 깐깐한 교수님의 지적이 꽤 스트레스라 중도 포기를 하고싶었지만 친구들의 응원으로 끝까지 마무리를 했고 나는 해당과목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받으며 장학금을 받았다.


9. 대학교 3학년, 선배를 따라서 조기 취업스터디를 시작한 기억 (만족도 7, 동기 부여 된) 교감

 배움과 성장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나는 선배를 잘 만난 덕분에 당시 4학년 취준생이던 선배를 따라 취업스터디에 매우 일찍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부터 나의 말하기 연습이 대략 시작된 것 같다. 목표를 향해서 준비하는 사람들의 선명한 눈빛과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취업시즌이 아니었지만 매우 열심히 스터디 활동을 했다. 같은 또래에게 질문을 받고 답변을 조리있게 하는 일이 매우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6개월 쯤 지나면서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캠퍼스 리쿠르팅에서 좋은 점수로 현장 인터뷰를 통과하며 서류 심사 없이 바로 모 기업에 1차 면접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10. 2007년 12월, 24살 크리스마스 이브날 받은 최종합격통보 (만족도 10, 황홀한) 고양 

 3달에 걸친 면접 전형이 끝나고 24살 크리스마스이브에 지원한 회사로부터 최종합격 소식을 받았다. 당시 실무진 면접에 어떻게든 합격하기위해 여러매장을 돌아다니며 조사한 내용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서 제출했다. 서울로 가는 당일 새벽 5시에 pc방에 들러서 수정하고 다듬어  프린트를 하고 날밤을 새우고 면접을 보러가기도 했고 최종면접에는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반영이 되어 전 매장의 네임텍이 일괄적으로 변경이 되는 성과를 만들기도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언제나 "어떻게 하면 다를게 할 수 있을까? " "고객의 편의를 위해 우리가 바뀔 건 없을까? " 를 항상 생각하곤 했던 것 같다.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졸업하기전에 무조건 취직을 해야지 졸업식날 떳떳하다.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회사로 취직을 하겠다)는 일념하에 나를 온전히 다 써버리기로 작정을 하고 면접에 임했다. 당시 면접을 봐주셨던 분이 입사 후 말씀하시기를 "너는 안뽑아주면 죽을 것 같이 열심히 하더라."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주신 기억이 난다. 간절하게 바라는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때 나는 서초동, 강남역을 처음 가보게 되었고 연수원으로 들어가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정장을 입고 본사건물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가던 그날의 기쁨이 20대의 가장 큰 성취감이었다. 서울스러운 모든 것들에 너무나도 튀었던 나의 사투리와 어리벙벙함을 좋아해준 동기들과 즐거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1. 2009년 초보운전자가 처음 차를 몰고 강남역에서 일산까지 자유로를 타고 운전을 한 날 

(만족도 5, 기진맥진한) 고양

 프랜차이즈기업 수퍼바이저는 기동력이 생명으로 일주일에 2-3일은 외근을 다니면서 자신이 관리하는 점포를 돌아다닌다.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간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지하철 노선도 조차 어색했는데 운전면허증을 따서 차를 몰고 출근을 하게 되었다. 할 수 있을까? 너무 겁이났다. 도저히 못할 것 같았다. 동네에서 도로주행을 하는것도 힘들었는데 왕복 80km가 넘는 거리를 일주일에 2-3회를 다녀야 하는것은 시골처녀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것 같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무조건 취직을 하겠다고 나에대한 고민없이 직장에 덜컥 들어간 일이 후회로 밀려왔다.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매력적인 연봉과 회사의 분위기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취직하는 일이 정말 자신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부정적인 동기부여로 나를 몰아세우며 장거리 운전으로 혹독하게 초보운전시기를 보냈다. 점점 편안해졌다. 어떤 날은 장시간 운전을 하며 음악을 듣는 일에 큰 매력을 느끼며 직장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는 하나씩 못할 것 같은 일들을 해내는 경험을 쌓아갔다. 


12. 2010년 10월 결혼과 퇴사 (만족도 3, 마음이 불편한) 구덩이 

남편과 나는 10살이라는 나이차이가 났고 남편과 직급 차이가 나다보니 여러모로 주변사람들이 애매해지는 불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남편이 퇴사를 권유했지만 나는 나의 일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 문제로 계속 갈등이 생겼고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는 일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또 다시 도망갔다. 안 뽑아 주면 죽을 것 처럼 애를 쓰면서 기어코 들어갔던 회사를 내 손으로 놓았다. 이런 선택을 하면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 내가 포기를 하면 갈등이 해결된다는 믿음으로 퇴사를 했다. 


13. 2013년 대학원에 진학 (만족도 7, 영감을 받은) 교감

 30살에 대학원을 진학했고 학생이 되었다. 당시 조금씩 프리랜서로 CS강의를 하고있었던 나는 교수님과 다른 석박사 과정의 연구생들과 함께 과정개발을 진행했다. 낮 시간동안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하며 배움에 몰입했던 시기는 내 삶이 책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14. 2014년 내 인생 최대로 강의가 폭망한 날 (만족도 1, 비참한) 통찰 

 기업의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다양성관리라는 주제로 과정개발을 하고 강의를 직접 진행하게 되었다. 과정개발은 매우 즐겁게 했지만 누군가에게 이 단시간에 학습한 내용으로 강의를 하는것은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었다. 부담스러운 교육대상자의 눈빛을 강의시간에 마주하는 순간 숨이 막힐 것 처럼 떨렸다. 목소리가 너무 떨리고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하면서 시작한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서 이미 강의가 폭망해가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사람들의 불신가득한 눈빛을 8시간이나 감당해야했다.  그 때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나는 연구자가 맞는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함께 강의를 했던 강사님과 너무 비교가 되어서 강의장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싶었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인생 최대의 흑역사로 기억이 된다. 지금은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 넉살 좋게 이야기도 하는 여유가 생겼지만 31살의 나는 병아리와 같았다. 


15. 2015년 임신과 석사학위 논문 통과 (만족도 9, 짜릿한) 긍지

처음으로 연구주제를 정하고 설계를 하고 설문지를 돌리고 통계프로그램을 직접 공부해서 분석을 하면서 연구자의 마음가짐으로 공부를 했던 진한 경험이었다. 논문을 마무리 할 때 쯤 결혼한 지 5년만에 생각지 못한 아이가 생겼다. 기쁨보다는 정말 괜찮을까? 내가 어떻게 엄마가 될까? 라는 모호함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맞이했다. 그렇게 아이를 배속에 품으며 대학원 생활을 마무리했고 졸업식날 누구보다 남편이 가장 큰 축하를 해주었다. 논문을 쓰는동안 하루종일 서재에 있는 나에게 스탠드와 의자를 사주고 설문지를 무려 250장이 넘게 회수 될 수 있도록 관련업계 사람들에게 배포를 해주었다. 대구에서 올라오신 부모님과 함께 졸업식 사진을 찍는 날 뱃 속에 있던 아이와 나의 가족은 그 당시 가장 행복한 날로 하루를 마무리 했던 것 같다. 


16. 2016년 2월 써니의 탄생 (만족도 9, 염려하는) 고양

내가 태어나서 경험한 최대치의 통증을 느끼며 써니를 출산한 날, 너무 큰 통증을 경험하고 나니 애닳픈 마음에 조리원에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써니를 집으로 데려온 첫 날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쌔근 쌔근 잠든 써니가 너무 많이 자면.. 걱정이 되었다. 왔다 갔다 하며 코끝에 손가락을 대며 숨을 쉬나 안쉬나 확인을 했다. 너무 작은 생명체가 혹시라도 잘못될까봐 무서웠던것 같다. 그렇게 안절부절 하며 아이 곁을 지키는 나는 아이와 함께 내안에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나를 함께 키웠다. 


17. 2017년 4월 기러기부부가 된 날 (만족도 1, 침울한) 통찰 

 써니가 14개월이었을때 남편이 해외로 나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날 짐을 싸서 인천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던 우리의 마지막을. 써니의 아빠가 울었다. 아주 많이 울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가 버거워 친정이 있는 대구로 내려왔다. 부모님은 딸이 결혼에 실패해서 내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아이아빠의 용기에 항상 고맙고 그 선택은 나와 아이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감으로 인한 것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써니의 아빠는 슈퍼맨일만큼 아이를 잘 돌보는 멋진 아빠였고 그런 남편은 토끼같은 딸을 두고 언제 돌아올 지 기약도 없이 해외로 가게 되었다. 항상 높은 연봉을 받아야 된다. 우리가족을 굶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책임감으로 인해 가장 좋은 기회와 가능성에 아이아빠는 베팅을 했다. 아이아빠의 승승장구 커리어를 항상 동경했던 나는 곁에서 그가 받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비슷한 시기의 남편 직장 선배와 동료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직을하고 퇴사를 하는지 잘 알고있었기에 써니 아빠의 선택이 절대적으로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6년차가 되었다. 코로나로인해 1년 몇개월 만에 가족이 만났다. 남편을 1년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되리라고 상상도 못한 나의 삶. 고단했다. 14개월이었던 써니가 이제 6살이 되었다. 만 5년을 혼자 아이를 키우며 가끔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혼자 눈물을 흘렸던 수없는 밤이 있었다. 우리는 각자 힘들었다. 서로의 힘듦을 보듬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외로움의 몫은 1인분으로 알아서 해결했다. 누구하나가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질질 짜는 순간, 우리가 차곡차곡 쌓았던 공든 탑이 무너질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 아빠, 안녕!!!! 보고싶어!!!! " 라고 소리지른다. 


18. 2019년 2월 남편의 빚잔치 커밍아웃 (만족도 0, 절망한) 통찰 

아이의 아빠가 아주 심각한 목소리로 갚아야 하는 빚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인생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렇게 누가 훅~ 치고 들어 올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늪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죽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억울했고 원망스러웠고 평온한 삶에 이런 일이 생긴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마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아주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것 같다. 하얗고 보들보들 예쁜 딸아이가 엄마없이 크는애가 되는건 지금 내가 겪는 고통보다 더 끔찍하게 싫을 것 같아서 아이에 대한 책임감으로 삶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니 일단 연명하기로 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엄마가 되고싶었다. 3일을 죽도록 울었다. 어떻게 살아야할 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만큼 캄캄했던 시기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내 머릿속에 울고있는 괴물들로인해 정신줄을 놓을 것 같아서 그리고 돈이 필요해서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내가 워킹맘이 된 결정적인 계기다.


19. 2019년 4월 워킹맘이 되다 (만족도8, 희망찬) 통찰 

 "이제 네가 세상으로 나가라" 라는 말에 힘을 얻어서 일을 시작했다. 내 삶이 아무리 가족이지만 타인으로 인해 영향을 받는것은 억울했다. 자기결정권이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휘청거려도 내가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가 너무 예쁘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 큰 행복을 느끼며 나 자신을 엄마라는 역할로만 쓰게 한 댓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른 역할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나에게 기회를 주고싶었다. 취업준비를 대학생처럼 하니 한달반 만에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중소기업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첫 출근 날 입으려고 준비한 새 정장을 걸어놓고 쳐다보며 잠들지 못했다. 


20. 2020년 5년만에 회사에서 사내강의를 진행한 일 (만족도 9, 만족스러운) 통찰 

 교육메뉴얼을 만든 일, CS, 이미지메이킹, 여성리더쉽 등 50대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하고싶었던 일을 자발적으로 기획해서 진행을 했다. 입사는 여행OP로 했지만 회사에서 2인분의 일을 하며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연결고리를 만들어갔다. 다시 나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21. 2020년 7월 퇴사 (만족도 8, 낙관적인)

교육과정개발과 강의가 다시 하고싶었다. 바닥부터 다시 입사를 했지만 이대로 나를 고만 고만한 일에 두는 것은 나를 100% 다 쓰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서 많은 일을 자발적으로 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킹맘이 어쩔 수 없이 되어야 했던 시점부터 아주 많은 변화를 만들 내 모습에 대한 글을 블로그에 쓰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퇴사 후에 바로 일을 할 수 있도록 모 컨설팅사에서 일을 받아서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22. 2020년 10월 프리랜서가 된 3개월 만에 일이 없어진 일 (만족도 5, 염려하는)

 일이 없어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그동안 블로그와 인스타에 찔끔 찔끔 올린 글을 보면서 지인이 이런 긴 글은 브런치에 써야 한다며 강력하게 권유했다. 나의 지난 회사생활 성장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22. 2020년 11월 : 바닥부터 다시하는 엄마의 밥벌이 브런치북을 만들게 되었다. (만족도 9, 집중하는) 긍지

라떼마마 엄마독립프로젝트->나를 치유하는 밥벌이 ->바닥부터 다시하는 엄마의 밥벌이로 제목과 내용을 조금씩 정리했다. 이 브런치북 마지막 글을 연재하는 날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치유가 되는 것을 경험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을 것 같은 일들, 내게 고스란히 아픔과 상처로 남아있는 일들이 글을 쓰면서 하나, 둘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내인생은 폭망했다고 단 하나의 단어로 지난 시간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다가 글을 쓰면서 그 안에서 하루하루 있었던 여러가지 다채로운 일들로 좋았던 보석같은 일들을 발견했고 내가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 되어있음을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23. 2021년 3월 대기업 OO사의 온라인 강의 진행을 하게 된 일  (만족도 10, 의기양양한) 통찰&긍지

 회사를 나오고 6개월 만이었다. 나는 불과 6개월 전까지 중소기업 말단 직원이었다. 그런 나에게 퇴사 후 여러 기회가 찾아왔다. CS 모니터링/컨설팅, 대학교, 공기업 강의를 했다. 고만고만한 일들을 하다가 다시 스트레스 레벨이 높은 일을 마주하며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쳤지만 이 두려움의 끝에 나의 성장이 있다는 것은 100% 확실한 일이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중 가장 마음의 부담이 심했던 일이 대기업 온라인 강의였다. 과정 개발을 하는 일은 열심히 ppt를 만들면 되지만 온라인 강의는 많은 경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24. 2021년 4월 한달어스 자기발견 나의 일 (만족도 8, 낙관적인) 긍지 

 강의를 하면서 나의 전문분야를 뾰족하게 하고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한달어스. 나와 fit되는 분야는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치열하게 하고싶어서 작정하고 글을 쓰며 무너진 내 삶을 다시 세우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한달내내 아주 긴 호흡의 자기발견 글을 완주했다. 간절하게 찾기를 원했던 나만의 한단어를 찾아가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나에대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수집했다. 지난 10년동안 내가 나에 대해서 알게 된 것 보다 한달 자기발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알게 된 나가 훨씬 더 밀도있었다. 


25. 2021년 5월 온라인 강의 영상을 제작한 일 (만족도 9, 자랑스러운) 통찰&긍지 

내 삶에 이런 모습은 전혀 없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원히 도태될 것 같아서 한번도 해본적 없는 영상 강의 촬영 제안에 응하며 강의교안을 업그레이드하고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을 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내고나니 자신감이 정말 많이 생겼다. 여러 대학교에 연락을 해서 정성스럽게 제안서를 쓰고 나를 알리는 일을 했다. 나에게 이런 여유와 넉살과 자신감이 생기리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오늘의 나는 2019년, 눈물을 흘렸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성장해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거르고 걸러서 남는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