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에서 성장지대에 오르기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요조-
사는게 힘이 들어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그만 살면 되지 뭐. 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인생의 구덩이를 지나가는 이야기
내 인생은 그래프에서 가장 깊은 구덩이었던 1번 시기의 전과 후로 나뉜다. 더 이상 살고싶지 않다는 말이 습관적으로 마음속에서 피어나던 시기에 에버노트에 글을 썼다.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 라는 책을 보면서 나도 딸에게 이런 편지글을 남기는 엄마가 되고싶다는 생각으로 2-3살 무렵의 딸, 써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글을 잔잔하게 채웠다. 하지만 당시 나의 글은 곧 다가올 이별에 대한 유서에 가까운 문체로 기록되고 있었다. 나는 아마 견디지 못할거라고. 도저히 견디지 못할거라고. 스스로에 대한 불안함의 결론을 아주 섬뜩한 방법으로 내리곤 했다.
엄마의 삶이 이토록 가벼울 수 있을까? 그만살지 뭐. 라는 생각은 나는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으니 그냥 내 삶에서 자발적으로 퇴장하겠다는 의미다. 주어진 삶을 깃털처럼 가볍게 받아들이는 무책임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대구에서 기장까지 운전하다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고 긴 터널이 있다. 나는 그 터널을 지나갈 때 마다 (1)번 시기를 지났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과 이 터널의 끝이 있기나 할까? 라는 불안함으로 하루하루 형벌같은 나날들을 보냈던 시기가 지금도 떠오른다. 물론 지금은 경험으로 알고있다. 이 터널은 끝이 난다는 것을. 내가 운전대를 붙들고 나만의 속도로 집중하면 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내 삶에 불신만이 가득했다.
자기역사연표작성을 하면서 언급한 것 처럼 (1)번시기 이전까지의 나는 불편하거나 잘 알지 못하거나 힘들거나 갈등이 생기면 눈을 감고 그 자리를 피하는 사람이었다. 아마 1번의 시기를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도망가는 패턴의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두려웠던 점은 내게 일어난 상황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특정한 행동들을 해야하는데 내가 해야할 행동들이 자신이 없었고. 벌어진 일에 비해 내가 하게 되는 밥벌이는 그 영향력이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저 문제 해결에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신이 내게 너무나 어려운 문제를 휙~! 하고 던지고 가버린것 같았다. 시험지를 받은 나는 문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아서 '이 시험문제는 정말 어려울 거야. 내가 풀 수 없는 문제야. 틀리느니 그냥 쳐다보지 않을래' 라고 덮어두었다. 신은 왜 쓸데 없이 이런 문제를 나에게 주었을까? 라는 질문을 수백번도 더 했다.
사람은 힘이 들면 불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는다. 불행한 사람이 극복한 이야기를 보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보려고 한다. 왠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희망 한 점 섞인 의심으로.
당시 내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시험지를 풀겠다고 마음을 먹게 한 결정적인 글이 있다.
내 삶이 아주 밑바닥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읽고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점검하면 좋겠다.
이 세상은 큰 사람으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하거나 머물게 만들지 않는다. 계속해서 변화 발전하라고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기운이 큰 사람이 변화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하늘의 벌을 받는다. 우리 모두는 이 사회에 할 일이 있다. 스스로 그 길을 못 찾으면 사건 사고를 터지게 하면서라도 그 길을 가게 만든다.
태라의 기억의 창고 블로그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믿어서 나쁠 건 없으니 이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내가 분명 할 일이 있음에도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신이 나를 문 앞까지 몰고 간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내게 일어난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
엄마가 없어도 써니가 이 글을 읽으며 잘 커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 부끄러운 글은 더이상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 글을 읽으며 도움이 되느니 써니의 엄마로 일어서는 것이 책임감이 있는 태도일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깊은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를 원했다.
1번의 구덩이가 있기 전에도 내 삶에는 깊고 얕은 구덩이들이 있었다. 하나의 구덩이에서 나오며 전환점을 맞이할 때, 그 때는 앞으로 만나게 될 구덩이는 이 것 보다는 얕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마나 더 깊고 어두운 구덩이가 있을지 모른 채 내 삶은 그렇게 오르락과 내리락을 반복했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취업준비를 하면서 정확히 한달 반 만에 워킹맘이 되는데 성공한다. 몇 년만에 받아보는 월급에 가슴이 뛸 듯이 기뻤고 아침마다 또각 또각 힐을 신고 커피를 사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설레임으로 새벽 5시만 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발바닥에 용수철을 달아놓은 것 처럼 자꾸만 흥이났다. 그렇게 내 인생의 깊은 구덩이는 첫번째 전환점이 되면서 내 삶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깊게 각인된 회피 본능이 점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신념이 생기게 되었다.
해결불가능한 문제는 없다.
내 삶의 두 번째 전환점은 여행 오퍼레이터로 입사를 한 내가 다시 예전의 경력인 강사로 돌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한 일이다. 눈살이 찌푸려 질 수도 있는 오지랖 끝장나는 행동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사각형 틀안에 끼워 맞춘 것 같은 루틴한 일이 견딜수가 없었다. 20대 초반, 여행업계에서 내가 승부를 걸어보겠다고 작정을 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모든 것을 리셋하고 여행경력을 쌓기에는 조그마한 지방의 상조회사에서 전문성을 쌓는것은 불가능하고 무의미한 일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그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자아실현의 욕구가 생긴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먹고 살만하니 이제 다른 욕구가 생긴 것이다.
코로나로 여행업계가 잠잠해지는 틈을 타서 cs매뉴얼을 만들고 사내직원을 대상으로 강의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이 일로 아침마다 강의를 할 수 있는 영업본부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40-60대 여성을 대상으로 나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cs, 여성리더쉽, 이미지 메이킹 강의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게 되었다. 2인분의 일을 자처하며 그동안 없었던 일을 백지에서 하나하나 점을 찍어가며 시작하는 일은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고 나의 의지를 시험하는 일이었다. 아침마다 필사노트를 제작해서 영업사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침조회가 끝나면 고객관리와 관련된 개별적인 피드백도 자주 진행을 했다. 엄마들의 밥벌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고싶었다.
그렇게 다시 나의 일을 찾아가며 시간과 정성을 쏟다보니 온전하게 나의 일만 할 수 있는 환경에 있고 싶었다.
저울질 하기 시작하며 나는 결국 퇴사를 선택한다. 모 컨설팅 회사로 부터 MS 컨설팅 업무를 하게 되면서 환승이직과 같은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대략 3-4개월만에 종료가 되었다. 적어도 1년은 안정적인 밥벌이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업무가 없어지면서 나의 2번째 전환점을 만나게 된다.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리기가 힘들어서 아침마다 노트북 가방을 매고 나는 메뚜기 처럼 스타벅스를 전전긍긍하며 왔다갔다 하는 삶을 살았다. 엄마 일하러 다녀올게. 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뭐 해먹고 살지? 라는 생각을 했다.
중간에 해당 회사 대표로 부터 연락이 왔고 oo 일을 하면 좋겠는데 조건은 올해 취직하시면 안되요. 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까지 못을 박아놓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까지도 어떠한 문자도 전화도 없는 굴욕적인 일을 겪으면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두 번째 구덩이는 첫번째 구덩이 보다 깊지 않았지만 어둠고 고독했다.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없다는 믿음의 마법에서 풀리려고 할 때 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들을 보며 지인이 브런치를 추천했다. 이렇게 호흡이 긴 글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처음에 흘려 듣다가 정말 할- 일이 없어지면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엄청나게 넓은 하얀 여백을 나의 이야기로 채워나가는 재미, 하나씩 글을 완성해 나가는 재미를 느끼다가 브런치북을 응모하라는 공지를 보고 나의 회사생활 수기를 담은 이야기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에세이가 탄생했다. 글을 연재하면서 누군가가 보내주는 엄청난 댓글 응원에 뜨거운 힘을 받았던것 같다.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묘한 경험을 하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의 크고 작은 상처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세번 째 전환점을 지나며 자가면역이 강해진 나는 네번 째 전환점이 된 큰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바로 온라인으로 온라인 강의를 하는 방법을 실습과 함께 알려주는 강의를 진행하는 미션이었다. 과정개발도 한꼭지를 담당하면서 막막함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 익숙한 습관 회로가 나를 자극했다.
" 못하겠다고 해. 너무 힘들잖아. 그냥 안한다고 말해버려 "
하지만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하기로 했다. 심지어 3일동안이나 타지역에서 출장을 다녀와서 일주일 뒤에 바로 이어지는 강의였다. 최근 10년 동안 가장 잠을 자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혹여 과정설계가 실제 강의에서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을까봐 실습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수십번의 시뮬레이션을 했다. 강의 직전까지 교안은 계속 바뀌었고 오픈채팅방에서 각 조별로 학습자들을 핸들링까지 하며 실습 진행여부를 각각의 줌 회의실에 들어가서 확인을 해야했다.
"안돼요. 앞의 부분을 듣지 못했어요. 저는 줌 로그인이 안돼는데요?" 등등 돌발상황이 계속 생겼다. 온라인 강의로 온라인 강의를 진행하는 방법을 실습과 함께 알려주는 일은 지금까지 없던 일이었다. 다행이 사전에 준비한 반복된 시뮬레이션으로 모든 돌발상황을 마무리하며 강의를 끝냈다. 그 강의가 끝난 후 몇 십시간의 강의를 같은 방법으로 진행할 수 있게 되면서 나의 능력치가 6개월 전 보다 3달 전 보다 1달 전 보다 올라가고 있음이 몸으로 느껴졌다.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감각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일에서 느끼는 이러한 편안한 느낌, 예전처럼 애쓰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다면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 먹고살 길은 앞날이 캄캄하지만 오늘만큼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분좋음이 내 몸을 떠돌아 다녔다. 이 때 느낀 나에 대한 긍지는 나의 네번째 전환점이 되어 다시 더 높은 능력치가 요구되는 일 앞에 담담히 도전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
두려움은 영혼의 GPS다
십중팔구 두려움에는 방향성이 있다. 두려움이 방향을 가리킬 경우 어떻게 감지할까? 마음이나 머리에서 어떤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 그게 하나의 신호다. 모험적이고 창의적인 별의 별 도전이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도 자꾸만 생각난다면 두려움이 방향을 가리켜주는 거다. 그 생각을 따르면 어떨지 상상해보면 언제나 겁이 날 거다. 하지만 두려움은 말로 소통하는 게 아니라 느낌을 전달하는 식으로 최선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곧잘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 위험, 정지, 더 가면 안됨의 의미로 해석하고 만다.
믿음의 마법(마리폴레오)
나는 3번의 경험으로 단단해졌다. 6월은 어떤 스케줄로 나의 일을 채울까 고민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전화해서 나를 소개하고 정성껏 작성한 제안서를 보낸다. 물론 일이 하나도 없을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 학교리스트에 전화를 할까?에 집중하는 것으로 오늘 할 일을 마무리 한다.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해야 할 때에는 감정이 올라와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이 깊은 구덩이보다 어쩌면 몇 배나 더 깊은 구덩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끝없이 떨어지는 깊은 바닥 이후에는 또 달라진 내가 있다는 것.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나는 해나는 사람이라는 데이터들이 조금씩 쌓이면서 그 때만큼 불안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