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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Dec 15. 2019

백아와 종자기의 부러움

인간은 손잡아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용기를 낸다.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에 대하여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누군가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진지하게 노력을 거듭하면
상대의 본질에 얼마만큼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 관하여
그에게 정말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태엽 감는 새’를 읽다가 메모를 해둔 문장이다. 우문에 가까운 물음이지만 답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완전한 이해는 할 수 없다. 대신 인정은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타의 이해보다 이기의 인정이 더 현실적이기에.  


  나와 가족에게 잔인할 뻔했던 올 가을, 며칠간이었지만 나는 건강검진 CT 판독에서 시한부 생명을 경험했다. 온몸에 힘은 빠져나갔지만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두렵고 서러운 것은 아니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로맨티스트로 불리고는 있지만, 겉과 다르게 속내가 니힐리스트인 나로서는 운명에 순응하고 사는 게 자연스러운 삶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서러웠던 건 뜻밖에도 병실 창밖의 형광불빛이었다. 잠 못 이루던 병실의 침잠된 어둠 속에서 건너편 복도의 형광불빛을 바라보며 새벽이 지나고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침묵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저 차갑게만 느껴지던 형광불빛도 불면의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이 고마워서였다.



  완전한 이해까지는 아니라도 서로를 인정해 주는 관계를 상상했다. 전경린의 소설 ‘내 생애 단 하루뿐인 특별한 날’을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처럼 매혹의 이끌림에 흔들리는 특별한 단 하루라도 자신의 취향을 인정해주고 서로의 재능을 인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백아와 종자기의 부러움이 따로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러움은 상상을 확장했다. 항우의 범증이나 유방의 장량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의 책사가 될 법한 사람 한 명, 두주불사의 번쾌 같은 무데뽀 술 동무 한 명, 육두문자의 인사까지도 반가운 친구 한 명, 여친 분위기의 지인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 소설을 썼다.


  미명의 새벽빛을 감지하고서야 나의 상상 소설은 끝났다. 탈고를 하고 보니 나에게도, 소시절 첫 멘토였던 초등학교 은사님께 아직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비록 몇 해 전 북망산으로 먼저 떠났지만 번쾌 친구도 있었고, 지엽적이지만 책사도 있었고, 육두문자로 인사를 나누는 죽마고우도 있었고, 매혹의 지인도 있었다.  형광불빛도 때로는 친구가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듯이 그동안 피부감 있게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https://brunch.co.kr/@erre-kim/114


  잠시나마 시한부 운명을 갖게 했던 조직검사 결과는 완치 가능한 폐렴으로 판명되었다. 6주간의 항생제 치료를 끝내고 재검사 결과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제는 나도 타인에게 범증이 되고 장량이 되고 번쾌가 되고 활력을 주는 비타민이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또다시 퇴색된다. 지리멸렬한 현실의 진부함이 감지되면 자신에게 합리적인 핑계로 안이한 공상에 뛰어든다. 그 공상 속에는 냉소까지는 아니지만 그다지 진지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매너리즘이 흐른다. 침잠된 마음에서 허우적거리며 자학을 하게 되는 나의 한계다.


  하지만 인간은 손잡아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용기를 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휴일이 끝나간다. 월요일이 오기 전, 가족이든 타인이든 주변을 두리번거려 그 한 사람을 오늘 또 찾아보자. 그리고 만나보자.

완전한 이해는 힘들어도 서로를 인정하는 사람이 어찌 한 명도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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