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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ug 23. 2019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나의 멘토 초등학교 은사님

(커버사진 : 봉래초등학교 2019년 교정)



바야흐로 멘토의 시대가 되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유래된 멘토는, 멘토르(Mentor)라는 지성인이 지혜와 신뢰로 친구의 아이에게 인생을 가르치고 이끌어주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최근 자주 등장하는 멘토가 대중문화 속에까지 파고들어 멘토 붐을 일으키고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멘토가 있었던가? 그동안 의식하지 않고 살았지만 내 인생의 첫 번째 멘토라면 주저 없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을 꼽을 수 있다.


나의 시골집과 같은 고흥 군내에 계시는 선생님은 고희를 넘긴 연세지만 아직도 건강미 넘치고 컴퓨터를 배우는 등 자기 계발에 불철주야 매진하고 있다. 선생님은 월남 파병을 마치고 정식교사가 되어 내가 유년의 시절을 보냈던 나로도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에는 최신 교육을 받은 교육자인 데다 젊었던 관계로 주로 6학년 담임을 맡았. 처음엔 누나의 담임이었다가 2년 후 내가 6학년이 되면서 나의 담임이 되었다.


선생님은 한 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전자제품을 다루는 손기술과 운동 그리고 예술 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운동회가 시작되면 선생님이 지닌 능력을 십분 발휘했는데, 나의 눈엔 우리들의 운동회가 아닌 선생님의 능력 발표회가 된 듯한 분위기였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였던 탈춤은 선생님이 직접 안무까지 맡았다. 서울 인사동에서 직접 구입한 소품으로 춘 탈춤이 워낙 인상적이어서인지 그때의 탈춤 가락을 지금까지 나는 잊지 않고 있다.


월남 파병 때 익힌 태권도를 전교생에게 전수하였다. 운동회 때에는 직접 화염을 뚫고 이단 옆차기와 높이차기로 기왓장 격파 시범을 보이는 등 전교생은 물론 학부형 모두에게 환호를 받았다. 나중엔 태권도 청도관까지 열어 방과 후에는 동네 태권도 사범으로도 활약했다.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것은 선생님의 손기술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엔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기에 전자제품에 대한 환상이 컸다. 전기제품에 관한 선생님의 손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화기에 붙은 수화기를 가지고 마이크를 만들기도 했고, 고장 난 발전기는 선생님의 손을 거치면 하얀 휘발유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돌아갔다. 전기 감전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우리들 앞에서 전봇대에 올라가 직접 전기가설도 했다. 이런 선생님의 용감한 모습이 그렇게 듬직하고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멋지고 눈부신 하얀 유니폼을 입고 연식정구를 치고 학교 축구대표 선수의 지도까지 했다. 그러다 팔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했다. 그 고통 중에서도 선생님 스스로 한 손을 마주 잡고 직접 뼈를 마치는 모습은 의사를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의 조부께서 접골원을 했기에 기본상식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다친 선생님의 팔이 지금도 구부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생님의 수업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시청각 수업 시간이었다. 학교에 OHP와 흑백 영사기가 있었지만 그동안의 선생님들께서는 사용법이 서툴러서였는지 아무도 사용을 하지 않았었다. 선생님이 오셔서야 비로소 시청각 교육이 시작되었다.  비록 6.25 전쟁 영화와 대한뉴스 같은 정부의 홍보적인 영화를 주로 보여주었지만 영화를 보는 날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날아갈 듯한 즐거움이었다.


선생님께 부끄러운 추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나는 당시 반장을 맡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질문을 친구들이 대답을 못하자 마지막 나에게 질문이 돌아왔다. 나 또한 그 질문에 답을 못하고 말았는데 "반장이 공부도 안 하는 모양이네."라는 꾸중에 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말았다.

나는 학급의 반장으로써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도였는지 "저희들은 모르는 것이 있기에 학교에 배우러 왔습니다"라는 대답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궤변이 아닐 수 없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당황한 선생님은 계면쩍은 미소로 무슨 말씀을 하셨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방학이 되어 선생님께 편지를 썼다. 며칠 후 선생님께서 답장을 보내 주셨다. 그 답장 안에는 내가 수업시간 질문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에 그 내용을 누가 볼까 봐 편지를 없애버렸지만, "영배가 수업시간에 울먹이면서 했던 말이 있지?"라는 문구만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추억도 있었다. 소풍 때 선생님 도시락을 못 챙겨 갔던 일이다. 소풍은 초등학교와 가까운 산으로 가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6학년 가을소풍은 초등학교 마지막 소풍이라 그랬는지, 학교와 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지금 나로도 우주센터가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는데 학교에서 가장 멀고 높은 산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20리가 넘는 거리였다.

 

소풍 때면 대개 반장이 선생님 도시락을 준비해 가던 시절이었다. 난 어린 시절에도 번거로운 것을 싫어했다. 내 자신의 도시락도 평소 학교에 싸가던 직사각형 도시락에 밥과 김치 그리고 계란말이만 싸 달라고 하고선 간편히 내 도시락만 들고 출발을 했다. 6학년의 소풍장소가 멀었던 관계로 장사치 외에는 우리를 따라오는 학부형이 없었고, 학부형들은 주로 동생들의 가까운 소풍장소로만 따라갔던 것이다.


행진을 하면서 가만히 보니 선생님의 손은 도시락이 없는 빈손이었다. 우리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당시 6학년 3개 학급의 담임선생님 모두 빈손으로 걷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들 식사를 궁금하게 여기면서 옆 반의 두 반장을 보니 그들은 각각 도시락 2개씩을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순간 아뿔싸! 싶었다.


우리 선생님께서 점심을 굶게 되겠구나, 라는 걱정을 하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마음만 졸이고 있었다.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어 선생님 눈치를 가만히 살폈다.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는데 마침 다른 반 친구가 우리 선생님 앞에 도시락을 내놓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다른 반 친구 중에 반장은 아니었지만, 가정형편이 좋은 친구가 선생님 도시락을 대신 준비해 왔던 것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붉어진다.


선생님은 오래전 교사를 그만두고 시골 고향에서 농사와 이 고장 특산물인 고흥유자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 홈페이지에 올린 선생님 글을 읽으며 선생님은 아직도 멋쟁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유자를 구입한 고객이 유자의 껍질이 오렌지나 귤처럼 깔끔하지 않고 거칠다는 항의성 게시글이 올라왔다. 이에 선생님은, 해풍 속에 크는 유자는 바람이 불면 유자나무 가시가 유자의 표면을 찌르기에 상처가 나고, 유기농으로 가꾼 유자는 비료로 키운 유자에 비해 껍질이 거칠다는 설명과 함께 진도아리랑을 곁들였다.


"탱자는 고와도 발길 밑에서 놀고, 유자는 얽어도 선비 손에서 논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선생님다운 멋진 답변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선생님과 수십 년 소식 없이 지내다 몇 년 전부터 선생님을 다시 뵙고 전화상이지만 선생님 홈페이지와 보좌관 같은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 좀 더 선생님을 가깝게 보필하고 싶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내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다.


선생님은 아직도 농사를 짓고 농장을 가꾸고 군청 문화교실에서 컴퓨터를 배워 동영상 편집까지 한다. 지적 호기심과 부지런함은 여전하다. 선생님이 지닌 예술적 감성과 유머에 찬 자신감은 지금도 나의 멘토가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선생님.  

                                                      

김영배 수필집 <마이너리그에도 커피 향은 흐른다>에서 (2014, 해드림출판사)

  


(좌) 은사님과 함께(2018년)  (우) 나의 모교 봉래초등학교 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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