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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pr 11. 2020

나 홀로 출간에서 인세까지

1인 출판 시대의 무료 제작 및 유통을 경험하다.

2019년.

저녁 산책 중이었다. 새롭게 들어선 빌딩에 갓 입주한 네온사인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컴퓨터 아카데미 학원이었다. IT프로그래머의 직업을 가진 나에게 흥미 있는 상호는 아니었지만 강의 과목이 궁금했다. 커리큘럼 하나가 눈에 띄었다. <편집 디자인> 과정이었다. 문득, 여태 디자이너 손길에만 의지했던 IT업무의 디자인도 내가 직접 배프로그래밍해야겠다는 의욕이 일었다. 나아가 편집 디자인을 배워 직접 책을 출간하고픈 마음까지 일었다. 나에게는 출간에 대한 안타까운 약속의 숙제가 있었기에.



2015년.

일요일 저녁이면 맹자강독에 참석했다. 60대 초반의 훈장은 경제학 전공 교수였지만 동양철학은 물론 서양철학과 서양미술사까지 해박했다. 개봉 영화도 빠짐없이 보며 매주 동문 홈페이지에는 영화평론을 연재하고 있었다. 훈장은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분히 해소해 주었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어느 날 나에게 면담요청이 왔다. 그간 연구한 동서양 철학 자료를 책으로 펴낼 계획인데 함께 자료를 정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훈장은 10권의 출간 계획을 갖고 있었다.  


1권과 2권 자료 완성  

3권과 4권 50% 작업 중 1~2년 뒤에 출간  

5권 50% 작업 중

6권 30% 작업 중, 5~6년 뒤에 출간  

7권 8권 9권 10권, 자료수집 중


나는 동서양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노자와 왕필에 대해서도 필히 공부하고 싶었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훈장은 노자와 왕필자료를 보내왔다. 200자 원고지로 각각 3,000매 1,300매 되는 분량이었다.

그러나 나의 비즈니스 일정에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1년 일정으로 프로그램 개발 차 도쿄로 급히 떠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출간 계획은 나에게서 잠시 잊혀졌다.


2017년. 

프로그램 개발을 마치고 1년 여만에 귀국을 했다. 훈장은 노자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인사차 전화를 드리며 조만간 노자 강의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외 공백을 메꾸고 정리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훈장이 나에게 거는 출판 기대가 부담으로 느껴져 강의 참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여러 번 바뀔 즈음 충격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훈장의 부음이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렇게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나약한 존재였던가. 통곡할 노릇이었다. 특히 출간 약속을 지키지 못 한 죄송스러움이 컸다.


퇴근 후, 3시간씩 청춘들과 함께 열공했던 순간도 행복했다.


2020년.

작년에 창립 특전인 50% 할인가로 6개월 수강을 신청했다. 포토샵(2개월), 일러스트(2개월), 프리미어 프로(1개월), 인디자인(보충수업)까지 익혔다. 이제 책 편집 실전이 남았다. 출간 워밍업으로 브런치에 써 둔 글을 찾았다. 가장 분량이 적은 파리 여행 원고를 선택해서 인디자인 편집을 시작했다. 1주일 만에 사진을 포함한 120페이지 46판 단행본이 완성되었다. 다음은 마지막 인쇄였다.


인쇄 과정에서는 의외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1권 인쇄도 가능하다는 디지털 인쇄소를 찾아갔지만 기술자들은 인디자인 툴 사용에 서툴렀다. 부부가 운영하는 세 번째 인쇄소에 들러서야 가까스로 한 권의 샘플 인쇄를 맡길 수 있었다. POD 인쇄라지만 즉시 무선제본은 불가능했다.

 

3일 후, 첫 출간이라는 기대를 안고 받아 든 샘플에서 큰 실망을 하였다. 표지의 폰트는 깨졌고, 100g의 지는 너무 두터워 넘기기가 불편했다. 표지 폰트는 인디자인 툴이 서툰 기술자의 실수요, 100g 지는 종이 재질을 모르고 선택했던 나의 무지였다. 폰트를 재조정하고 80g 지로  인쇄를 맡겼다. 다시 3일 후에 받아 본 두 번째 책은 후반부 몇 장이 거꾸로 제본되어 있었다. 영세한 인쇄소 문화에 실망이 컸다.


원고를 편집하고 인쇄소와 겪은 시행착오도 출간의 즐거움이었다.


서울로 눈을 돌렸다. 그때 서울의 지인이 운영하는 POD 출판이 생각났다. 곧장 이메일로 편집 원고를 보냈더니 다음 날 택배로 샘플 한 권이 총알처럼 도착했다. 나의 예상대로 제본된 첫 완성 책자를 손에 쥔 나는 감격에 겨워 자뻑의 설렘을 만끽했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라는 여행 산문집은 이렇게 탄생했다.


첫 출간 요령은 익혔지만 실전 경험을 더 쌓기 위해 곧장 두 번째 단행본 편집을 시작했다. <아내가 잠이 든 시각, 나는 글을 쓴다> 라는 산문집이었다. 3일 만에 180페이지 편집을 마쳤다. 미적 감각이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비매품 출간이었기에 디자인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오직 출간 시스템을 익히는데 관심을 집중했다.


ISBN 유통은 무료제작 싸이트인 교보퍼플을 이용했다.



비매품 출간이라지만 마음 한 구석엔 ISBN 코드가 찍힌 유통을 하고픈 호기심이 생겼다. 우선 얇은 여행 산문집을 가지고 첫 번째 ISBN 유통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무료 제작 및 유통이 가능한 교보문고 퍼플 사이트를 이용했다. 종이책과 eBook 제작에서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라는 표지 제목은 다른 저자가 이미 출간한 제목이었다. 따라서 부제였던 <나 홀로 파리여행>을 표지 제목으로 바꾸었다.


이후 교보 퍼플에 신청과 거부를 반복하다 출간 승인이 났다. 온라인 3대 서점(교보문고, YES24,알라딘)에 런칭도 되었다. 월말 정산 시기가 되면 판매수량에 따라 인세도 정산된다는 작가 계정의 <판매정산> 메뉴를 보니 출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세는 애당초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금액 여부를 떠나 개인통장에 인세가 찍히게 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창작이라는 순수 노동의 결실과 동시에 출판 프로젝트가 내 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제 훈장의 유작 원고를 출간 기획해야 한다. 언젠가는 유족과 출간 상의도 할 것이다. 나의 능력이 어디까지 발휘될지 나 또한 궁금하다. 문제는 노장사상을 틈틈이 익히는 것이다.

못 지킨 훈장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시작한 편집 디자인과 출판. 서툴긴 했지만 책을 편집하고 출판까지의 과정을 경험했다. 비록 시행착오는 겪었지만 나 홀로 출간, 즐거운 여정이었다.


함께 출간하자던 훈장의 마지막 메일과 자료 / 출간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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