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면 아직도 박인환 시인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 목마가 주인을 버리고 가을 속으로 떠났듯이 사내 셋이 잠시 아내들을 떠나 가을 여행을 떠난다. 방울 소리가 아닌 엔진 소리를 토하며 남도답사 1번지라는 강진을 향한다.
일행은 손위 동서들이다. 오디오 마니아인 대전의 사진작가와 시를 쓰지 않는 서울의 시인과 수필보다 썰을 좋아하는 광주의 나까지 세 명이다. 대전 형님은 사진작가의 정체성을 의심하기에 충분하도록 카메라를 놓고 왔다. 정체성에 관한한 나머지 두 명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은 3년 여 역사 저술에만 몰두해 있고, 수필가는 2년 가까이 문예지에 겨우 두 편의 수필만을 발표했기에.
처음 기착지는 강진에 있는 성전 무위寺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다녀온 적이 있는 절이다. 담장 없이 확 트인 경내에는 여전히 기념품 가게 하나 없는 썰렁함은 여전하다. 카프카의 무위와 노자, 장자의 무위를 생각하며 걷는데 단청의 화려함이 눈에 띈다. 무위(無爲)와는 거리가 느껴지는 분위기다. 순간 고즈넉함을 기대했던 마음이 아쉬움으로 바뀐다.
음, 컬러 디자인 시대에 무위사도 결코 낙오가 될 수 없다는 거겠지?
중학교 수학여행 때의 기억이 아련히 스친다. 수학여행이기에 모처럼 주머니의 용돈은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기념품 가게 하나 없는 외딴 작은 절에서 돈은 무용지물이었다. 입이 즐거워야 마음도 즐거운 법인데 콜라, 환타 한 모금 사 마실 수 없는 상황인지라 마음은 온통 불만 투성이었다. 선생님의 호통 속에 쪼그리고 앉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부도비의 설명을 진부하게 들을 따름이었다. 이게 성전 무위사에 대한 내 기억의 전부였다.
어린 기억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도비를 찾아보기로 한다. 도대체 얼마나 컸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고 했을까? 별 기대 없이 평범한 발걸음으로 대웅전 마당에 들어선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 시대에 도착한 듯한 소담스럽고 앤티크한 목조건물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무위사의 주전각은 석가모니 본존불을 모신 대웅전이 아닌 아미타불을 보신 극락보전이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의 극락보전 만큼은 새로이 단청을 하지 않는 예스러움이 그대로 풍기고 있다. 화려함은 없지만 미니멀리즘한 간결성이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화려함의 자태만이 미학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흑백사진에 정이 가고 나목의 앙상함에도 눈길이 가는 것은 화려함에 지친 마음일지도 모른다. 비록 단청은 퇴색되었지만 간결한 극락보전의 모습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내가 그리워하는 절집의 모습이기에. 그래서 구례 화엄사에 가면 각황전 앞에서 오래 머문다. 오랜 세월에 바래진 낡은 단청이 살가워서다. 수학여행 때 분명 국보 13호의 극락보전 목조건물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기억에는 전혀 자리하고 있지 않다. 아무리 국보라고 해도 당시 콜라 한 병의 불만과 미련에는 당할 수 없었던가 보다.
잠시 후, 소싯적의 기억과 재회하기 위해 부도비 앞에 선다. 정확한 명칭은 ‘선각대사 편광탑비’ 다. 2미터가 넘는 높이지만 소싯적 높이에 비해 지금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기억이 없는 극락보전의 국보에 비해 편광탑비의 기억은 콜라 한 병의 기억을 눌렀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겠다.
유일한 기억인 편광탑비. 순도100%의 강진 하늘
강진은 일조량이 풍부하기에 우리나라 하늘에서 파랑의 원색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강진의 하늘답게 무위사의 풍광은 나와 일행을 평안한 마음으로 오랜 시간 머물게 한다. 소싯적 기억에서 가끔 허허로움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리워지는 건 동심의 마음으로 오염된 마음을 씻고 싶은 생각이 아닐까 한다. 다시 극락보전으로 들어서는데 낭랑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손위 동서들에게 썰을 풀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절에서 잘생긴 젊은 스님의 독경소리가 불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답니다. 근데 이 젊은 스님이 다른 절로 떠났는지 어느 날부터 독경소리를 들을 수 없었지요. 낭랑한 독경소리를 그리워한 여성 불자가 지나가는 노스님에게 물어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