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행복해질 권리가 내게도 있다고 믿었다. 열심히 산만큼의 수입을 갖고 싶었다. 보통의 일상을 꿈꿨다. 이 정도면 욕심부리지 않는 거라고, 이 정도면 들어줄 거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나아갈수록 물러나는 것 같았다. 문 워크처럼 앞으로 발을 내딛는데 몸은 자꾸만 뒤로 가는 느낌.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2018 웅진지식하우스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와 우라노스가 카오스에 에로스를 불어넣었다고 하였다. 텅 빈 공허에 하늘과 땅을 만들어 사랑으로 세상을 채웠다는 것인데 神과 人間의 불완전한 조합이어서 그랬을까? 나 또한 사는 것이 왜 이토록 서툴고 불안정하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 드는 생각이 있다. 혹시 내 자신 외에도 직업이 문제인가? 한 번 직업은 영원한 것인가? 만약 직업을 바꾼다면 나에게 가능한 직업은 무엇일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 잘하는 것은 직업으로 삼고 좋아하는 것은 취미로 삼으라 했다. 노래를 좋아한다고 당장 가수가 될 수 없다. 리듬감은 후천적 노력도 가능하지만 음량은 선천적 재능이다. 리듬감과 음량이 풍부해야만 가수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어린 시절, 목공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남자는 모름지기 공고나 공대에서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주입식 가정교육을 받았다. 도그마에 가까운 아버지의 절대적 한마디에 이과생이 되었다.
잠깐이나마 화가나 스포츠 기자를 꿈꾸던 때가 있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것은 만화와 그림을 좋아했었던 마음에서였고,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모든 스포츠를 무료입장하여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기술을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나는 IT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물론 내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였다. 내 능력과 적성에 맞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직업으로 재테크를 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업을 상상해 보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있어서다. 적성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는 직업과 취미의 차이일 것이다. 직업은 수동적이지만 취미는 능동적이다. 선호도에서 취미가 직업을 앞설 수밖에 없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마찬가지 상황이 될 것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글쓰기다. 음악과 미술을 감상하는 것이 취미가 되어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 날 수필가가 되었다. 나로서는 프로그래머 다음으로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은 전업 작가라는 직업일 것이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이 직업으로서 현실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프로그래머의 수입보다 작가의 수입이 높아 가계살림이 원활하다면 언제든지 직업이 바뀔 가능성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발로라고 한다.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인데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글쓰기로는 직업이 아닌 취미생활에서 머물 수밖에 없다. 나의 글쓰기는 좋아하는 취미지 잘하는 직업이 아니라는 게 객관적 판단이다.
책을 읽고 음악과 그림을 감상하며 글을 쓰는 순간은 언제나 즐겁다. 직업이 아닌 취미이기에 가능한 즐거움이다. 나의 취미는 직업의 윤활유 역할이 더 어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