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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Jun 26. 2020

한계령이 그리운 날에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잿빛의 을씨년스러움. 회색이라는 빛깔은 불분명한 변절의 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사색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마력이 있다.  


아내의 근무 스케줄에 맞추어 새벽녘에 집을 나서는 경우가 있다. 운전을 못 하는 뚜벅이 아내를 위해서다. 눈을 떠 일어나기까지는 절망의 게으름을 피운다. 설렘이 사라진 부부에게 남는 것은 반려자로서의 믿음이다. 오직 믿음을 위한 자기 최면으로 집을 나선다. 회색빛 안개에 싸인 아파트 화단을 돌아 서는 데 이름 모를 꽃나무가 얼굴을 스친다. 간밤의 빗물을 머금은 아침이슬이 살갗을 적신다. 그제야 혼미한 정신이 맑아진다.


아내가 마시는 커피 향이 자동차 안을 적신다. 여유로운 영혼으로 태세 변환을 마친 나는 음악 CD를 찾는다. 고요한 새벽에 어울리는 음악으로는 포레의 <꿈을 따라서>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와 같은 음악이 좋다. 장맛비의 영향으로 옅은 안개가 드리워진 오늘 새벽은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이 듣고 싶다. CD 대신 휴대폰을 꺼내 아내와 함께 유튜브 음악을 듣는다.    


목월의 詩 <산이 날 에워싸고>의 분위기에 젖게 되는 <한계령>은 무척이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노래다. 배경에 젖어 흘러드는 전자올갠의 시큰함 또한 이 노래의 매력이다.  


저 산은 내게 우지 마라 우지 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너무도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시간에 바쁜 현대인에게 차분한 마음을 지니게 하는 음악이기도 하고.


양희은 <한계령> 듣기

https://youtu.be/RLevdLXYWwo


(좌)안개에 젖은  한계령(2013년)        (우)철지난 하조대(2013년)



나는 한계령을 2013년에서야 처음 가보았다. 나 홀로 떠난 그날도 한계령은 가랑비가 오락가락했다. 뿌연 안개에 젖은 한계령을 보며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장면을 오버랩시켜 보았다. 한밤 중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달빛이 흐르는 메밀밭과 새벽안개를 머금은 한계령은 서로의 질감은 다르지만 고즈넉함이 비슷해서였다. 달빛에 젖은 메밀밭은 흐뭇함을 느끼게 하고, 안개에 젖은 한계령은 생명의 고동을 느끼게 했다. 메밀전에 막걸리 한잔 했으면 금상첨화였을 터인데 운전이 발목을 잡았다. 오늘 불쑥 한계령에 가고 싶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렇게 저렇게 얽힌 일상에서 홀연히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어디 보통 일이던가. 멈춤과 떠남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꿈은 꾸어야 한다. 후회가 꿈을 대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고, 호기심이 사라진 순간부터 사람은 늙어간다고도 하지 않던가.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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