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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Nov 22. 2019

망우물

넘칠 듯이 따르고 가슴 깊이 마시자.

근심을 푸는 곳은 어디일까. 이름으로 풀어 본다면 사찰의 해우소(解憂所)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근심 걱정을 잊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겐 망우물(亡憂物)이다. 술의 별칭이기도 하다.

마음의 정체가 느껴질 때면 찾던 맥주를 2개월째 금주하고 있다. 12월까지 항생제를 복용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참아야 한다는 현실이 맥주 마니아에겐 걱정 아닌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망우물로 풀어야 한다.


주당들은 술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마력의 물이라고 찬사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술의 매력에 대해 애주가인 나로서는 일단 공감한다. 그러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보다 술잔에 빠져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하니 마냥 술을 마실 수도 없다. (註1)


술은 적당히 마시면 건강에 이롭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에게도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중용의 미학인 ‘적당히’가 아닐까? 특히 술이 그렇다. 계영배(戒盈杯)의 음주 철학도 김영배의 맥주 거품 앞에서는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대학 2학년 가을 무렵부터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직 소주는 못 마시지만 맥주는 무척 좋아한다. 맥주 마니아다. 적정 주량은 3,000cc 정도 마시면 취기를 느끼는데 이때 최상의 기분을 유지한다. 그러나 더 이상 취할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


술은 좋아 하지만 주당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있었다. 술 마신 다음 날 술기운에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는 변명 같은 이야기다. 과거형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은 싫어하지 않다는 것인데, 몇 년 전 나도 ‘블랙아웃’을 경험하고부터는 부정을 못 하고 있다.

서울에서 거래처 담당자와 자정 무렵까지 맥주를 마셨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광주의 우리 집이었다. 심야버스를 타려고 강남 고속버스터미널까지 택시를 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잃어버린 소지품도 없었고 다친 곳도 없었다. 불가사의한 이 상황을 의학용어로 블랙아웃이라고 했다.  


나에게 블랙아웃의 굴욕을 주었던 맥주는 매년 세계의 진기록을 모아 인증을 수여하고 발간하는 기네스북의 후원사였던 바로 기네스(Guinness) 맥주였다. 기네스에는 내 기록이 없지만 내 기억에는 기네스의 블랙아웃 진기록이 존재한다.


성룡과 소화자. 취권(醉券) 스틸컷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신 다지만 술좌석이 길어지면 액션스타 성룡이 스타덤에 올랐던 취권(醉券) 영화에 나오는 소화자의 대사를 언제나 생각한다.

싸움은 걸되 받치질 말고
술은 마시되 취하지 말라


시인 이태백 하면 두주불사만 생각났던 이미지에 신선함을 주었던 시구가 있었다. 흥겹게 술을 기울이던 벗에게 절주를 권유하는 모습이 좋았다.

내 취하여 쉬려니
그대 그만 돌아가게나


나는 절주 하려는 마음을 지닌 사람과 소담스럽고 즐겁게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취기는 즐겨도 추하지는 말자라는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에겐 술 동무가 많지는 않다. 혼술을 많이 하는 편이다. 주량 또한 많이 줄었다. 이제 과음하면 숙취도 생긴다.


맥주를 가장 즐겼던 시절은 도쿄의 이자카야에서 한국 직원들과 마셨던 때였다.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더욱 즐겼던 것 같다. 특히 ‘아끼아지(秋味)’ 상표의 맥주를 즐겼다. 우리나라 말로 ‘가을의 맛’이라는 의미였기에 깊어가는 가을밤이면 야상곡과 더불어 아끼아지 맥주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그때 나는 일행들에게 다음과 건배를 외치기도 했다.    


나미나미(なみなみ, 넘칠 듯이)따르고
시미지미(しみじみ, 가슴 깊이)마시자.  


잔병치레 한번 없었던 내가 올가을 뜻하지 않게 폐렴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와 잠시 금주를 하고 있다. 마음이 정체된 이유다. 차선책으로 술 동무를 불러 술잔을 앞에 두고 담소라도 나눠야겠다. 근데 펍에 무알콜 맥주가 있으려나 모르겠네.  


 (註1) 주당들의 풍류세계 -남태우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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