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제베 Apr 07. 2020

그건 니 생각이고

프란츠 카프카 <절망은 나의 힘>

벚꽃이 진다. 엊그제 시작한 봄날인데 이토록 성급하게 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맑은 물에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너무 하얀 벚꽃은 오염된 공기로부터 내성이 없어서일까. 아니면 치고받는 세상사 눈을 감고 싶어서일까. 독백을 흘리자 떠난 벚꽃을 대신하여 홍조 띤 버찌가 대답한다.

  

  "그건 괜한 생각이고요."


샤덴프로이데. 남의 불행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기엔 너무 잔인한 마음이다.


샤덴프로이데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렉카처럼 눈만 뜨면 불행을 찾아다니는 직업도 있다. 이런 직업군에는 세계적 대표 기업으로 경매 회사인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있다. 이들은 컬렉션의 노이즈 마케팅을 위해 죽음, 이혼, 재산분할 등 불행의 냄새를 맡아 자극적 이슈를 만들어내는 기업이다. 세상에는 이렇듯 다양성이라고 하기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별별 비즈니스가 다 있다. 무작정 비난만을 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비즈니스다.


상대 진영의 불행을 바라며 이전투구하는 선거철 뉴스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 복잡하다고 고개를 돌려 모른 체 하기에는 내 자신 스스로에게 불편한 마음이 느껴진다. 앙가주망의 문제다. B급 시민이라는 자기 합리화로 불편한 마음을 밀어내지만 무기력한 기운은 어쩔 수가 없다.


활력을 위해 베란다에 나가 스쿼를 시작한다. 고행도 아니요 쾌락도 아닌 심장의 열기가 가쁜 호흡으로 감지된다. 창문을 열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 시킨다. 저 멀리 차가운 불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분위기에 젖어 있는 당구장의 불빛이다. 텅 빈 당구대를 쳐다보고 있을 주인의 마음은 도시의 고독일까 삶의 고독일까.   




핸드 드립으로 블루마운틴 커피를 내린다. 고소한 커피 향은 언제나 내 영혼을 의연하게 한다. 책상에 앉아 PC의 부팅 화면을 바라보는데 허망한 기운이 감돈다. 자기 연민의 시작이다.


욕망의 존재를 떠나 일탈을 꿈꾸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책임과 의무의 멍에를 짊어진 채, 현실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억울함이 느껴지는 건 또 왜 일까. 나의 삶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안빈낙도를 꿈꾸는 삶에도 이렇듯 마음의 경련이 일 때가 있다.  



이런 날은 마루야마 겐지 책에서 등짝 스매싱을 맞아야 하는데, 하필 카프카의 절망이네...그래도 때론 절망도 힘이라고 하니까



PC를 끄고 프란츠 카프카의 고백서인 <절망은 나의 힘>을 펼친다. ‘미래에 절망하다’와 ‘세상에 절망하다’가 눈에 띈다. 카프카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에서 의욕은 있으나 할 일은 없다고 절망한다. 중년을 소진해 가는 이들의 공통적 우울함 같은 것이다. 중년이 반응한다.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나는 언제 절망하는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순간에 절망을 느낀다. 아직도 책임의 한계를 내 스스로 내 능력에 맞게 객관적으로 만들며 살아왔는지 확신이 없다. 이 불분명한 확신이 나를 항상 절망케 한다. 가끔은 속세를 떠나 종교에 귀의하는 출가를 상상 때가 있다. 물론, 5분 정도의 생각에 그치고 만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지울 수 없어서가 아니다. 나의 이기심이다. 출가를 하면 밤늦게 책을 읽을 수 없고, 커피와 맥주를 마실 수 없고, 휴일의 늦잠을 만끽할 수 없을 것 같기에.  


오래전 청백리 태국 시장이었던 잠롱은 정치 소요사태를 겪은 후 출가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영화 <사관과 신사>에서 주연을 맡았던 리처드 기어도 불교에 귀의하여 수도자가 되겠다고 공언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소식에서 출가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없다. 두 사람은 어떤 마음에 출가를 공언했고 왜 결심을 굳힐 수 없었을까.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절망을 잊을 때가 있다. 문명의 이기가 우리 생활에 주는 편리함에 몰입 때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한 번 길들여진 편리함은 보통의 정신자세로는 끊기 어렵다. 천박한 자본주의라지만 가진 자에게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금기의 유혹은 유쾌한 스릴로 다가선다. 정신은 결코 물질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일까?


오나라의 부차나 월나라의 구천의 정신을 생각한다. 그들도 화려하고 편리한 지금 세상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섶에서 잠을 자며 곰쓸개를 맛본다는 ‘와신상담’의 한자성어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부차와 구천이 이구동성으로 오버하지 말라는 외침이 들린다.

그건 네놈의 혼자 생각이고!!!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페티시즘과 스노비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