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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Apr 29. 2020

페티시즘과 스노비즘

초판 1쇄의 집착


맥주펍이라고 독서를 못할쏘냐. 카페에서 책을 읽듯이 맥주펍에서도 나는 책을 읽는다. 대신 펍 안에서는 애주가의 술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 서핑을 하듯이 태블릿 eBook으로 읽다.


어느 날 태블릿의 배터리가 방전되고 말았다. 펍에서 마시는 혼술의 단점이 시선처리인데 난처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으로 시선 처리를 하며 맥주를 즐기는데 불현듯 나의 한 달 용돈이 얼마지?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최근 들어 비즈니스 외에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에 30만 원쯤 될 거라 예상했다. 카드내역을 집계한 결과를 보고는 짐짓 놀랐다. 비즈니스나 이벤트성 지출을 제외한 순수 개인용돈이 매월 평균 50만 원을 상회하고 있어서였다.  


펍에서는 인터넷 서핑을 하듯이 태블릿 eBook으로



용돈의 주요 지출처를 살펴보았다. 사회 교제비 20만 원(2~3회), 혼맥 10만 원(3~5회), 도서구입비 20만 원(10~15권)이 고정지출되고 있었다. 이렇게 용돈을 많이(?) 쓰는지 몰랐다. 외상(카드)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처럼 예산 범위를 무력화시키며 소득 대비 과지출을 하고 있었다.


긴축정책을 위한 지출 편성을 점검해 보았다. 지인과의 사회 교제비는 어쩔 수 없고 혼맥을 줄일까 생각했지만 음주의 미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줄일 수 있는 것은 도서구입비였다. 독서의 즐거움은 줄일 수 없지만 구입비용은 긴축이 가능했다. 새 책 대신 중고책과 eBook으로 대체하는 방법이다. 마침 집과 가까운 곳에 알라딘 중고서점이 오픈하기도 했고.  


그동안 독서는 주로 새 책으로만 했다. 같은 새 책이라도 초판 1쇄를 구입하려 애썼다. 초판 1쇄를 놓치면 떠난 버스를 놓친 양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정비석 소설가가 생존해 있을 때다. 당시 小說 김삿갓이 1~2개월 간격으로 총 6권이 출간되었었다. 천상병 시인은 이 책이 출간되면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하고 식사를 거르며 읽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소설이었는데 인터넷이 없던 시절 나도 동네 서점에 예약까지 해가며 재미있게 읽었다. 예약까지 했다는 것은 초판 1쇄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총 6권의 시리즈를 초판 1쇄로 책장을 채우고서 나 홀로 흐뭇해했다. 마치 컬렉터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4권을 분실한 아픔...


그러나 훗날 초판 1쇄의 한 권을 후배에게 빌려주었는데 분실이 되고 말았다. 상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헌책으로 초판 1쇄를 원하지 않았기에 小說 김삿갓은 5권의 초판 1쇄만 소장하고 있다. 짝사랑이 무산된 듯한 상실감으로 몇 날 며칠을 마음 아파했는지 모른다.  


나는 왜 초판 1쇄에 관심을 두는 것일까. 초판 1쇄에 집착하고 소장하는 습관은 일종의 페티시즘이다. 헌 책이 아닌 새 책에만 흥미가 있는 것은 스노비즘의 일종이다.


붓, 먹, 종이, 벼루는 옛 선비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네 친구다. 이른바 문방사우다. 친구처럼 사랑받는 벗과 같은 존재다. 하지만 선비들에게 이보다 더 사랑받는 용품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적이었다. 문방사우 못지않게 연적의 컬렉션은 사치스러울 정도로 다양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것도 문인들의 페티시즘적인 성향이라 볼 수 있겠다.


이런 성향의 페티시즘은 어디 연적뿐이었겠는가. 강병철과 삼태기가 후렴구를 아주 흥겹게 불렸던 ‘고려청자’ 제목의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월탄 박종화의 청자부(靑磁賦)라는 詩를 노래한 것인데 후렴구에 보면,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명, 장고, 술잔, 베개


가 나온다. 이것들은 “흙이면서 玉이더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어느 것 하나 페티시즘으로서 빠지지 않는 옥이었을 것이다.  


<고려청자> 강병철과 삼태기

https://youtu.be/kasxn2hE210



요즘 도서 구입비를 생각하면 스노비즘은 포기가 된다. 신간 외에는 헌책을 찾고 eBook 주문을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페티시즘적인 초판 1쇄는 포기가 되지 않는다. 나에게 페티시즘은 책에 대한 사랑법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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