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제베 Dec 22. 2020

따스함의 공자 서릿발의 맹자

나는 어떤 타입 인가

간밤엔 모처럼 철야를 하고 늦잠을 잤다. 이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는데 의외로 날씨가 포근하다. 곧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게 망설여지는 포근함이다. 커피숍에서 유유히 커피 향을 음미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기에, 신간 <한국의 논점 2021>을 사기 위해 서점을 향한다.        


얼굴에 스치는 바람은 여전히 포근하다. 동지가 하루 지난 삼동에 훈풍이라니. 패딩의 단추를 풀며 어제와 오늘의 날씨 차를 헤아린다. 공자와 맹자의 기온차를 느끼게 한다.       


봄날의 따스함이 풍겼다는 공자.
가을의 서릿발 같았다는 맹자.     


나는 어떤 스타일일까. 가만, My style은 콩글리쉬에 가깝고 My type이 네이티브 표현이라던데, 나는 어떤 타입일까.  

   


소설가 최민석의 <나의 서른여덟>이라는 산문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언뜻 지질하고 구구절절한 못난 남자의 이야기 같지만, 매너를 지키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에 대해 새삼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던 산문이었다.


최민석은 편의점의 계산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카드를 휙 던지듯 건네는 사람을 목격한다. 이런 행위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 가슴 아파한다. 


카페에서 커피가 뜨거우면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서 동생과 의견을 나눈다. 최민석 자신은 별거 아니니 식혀서 먹는다는 쪽이고, 동생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니 미지근하게 해달래서 마신다는 입장에 다소 놀라워도 했다. 나의 경우는 전자다. 


타인을 배려하는 성격은 말 한마디에도 조심하게 된다. 별것 아닌 것에도 신경이 쓰여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럴 때 최민석은 자신이 너무 유난을 떠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고 했다. 




나는 매너를 중요시하고 지키는 편이다. 하지만 무례한 사람에겐 똑같이 대하는 타입이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피장파장, 이판사판 합이 여섯 판이네 뭘! 하면서 씁쓰레한 웃음만을 허공에 날리곤 한다.      


공자와 맹자의 타입을 생각한다. 내가 바라는 건 포커페이스 보다는 의연한 모습의 이미지다. 이는 누구라도 좋아하는 모습이기에 나또한 공자 타입에 다가서려 노력한다. 하지만 냉정히 나 자신을 생각해 보면, 봄날의 따스한 공자보다는 가을의 서릿발 맹자를 더 마음에 들어한다. 아마도 숫기에 대한 일종의 나의 콤플렉스일 것이다. 


맹자를 떠올리니 칸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 하면 서릿발 이미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 정확하고 재미없는 맹자 못지않은 까칠한 이미지이다. 한마디로 노잼 타입이다. 다만, 와인 마니아였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칸트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아~ 좋다”라는 일성도 마지막 와인에 대한 맛의 감탄이었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칸트의 저서 중에서 익히 알려진 책들을 완독해 본 적이 없다.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해설서마저도 도대체! 읽어지지가 않았다. 대신 해설서를 읽으며 칸트의 3대 저서를 나름 요약해 놓은 것은 있다.       


1.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진리) 라는 <순수이성 비판>

2.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선함) 이라는 <실천이성 비판>

3.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아름다움) 이라는 <판단력 비판>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칸트의 3대 저서가 이야기하는 진리, 선함,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너무 거창한가? 


비록 거창할지라도, 이런 마음을 지니려고 애쓴다면 편의점이나 마트의 계산대에서 카드를 휙~ 던지 듯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다.





매거진의 이전글 페트라르카의 탄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