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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쟝아제베도 Jan 29. 2021

응답하라, 로미오 골프 골프

고독한 사냥꾼

     

거래처 유지보수 전화를 받는다. ‘90호’인지 ‘95’인지 서로 확인하느라 대화가 반복된다. 마스크를 쓴 채 나누는 대화에는 여전히 불명확한 발음이 전달된다. 코로나는 일상의 대화에서조차 곤란을 겪게 한다.     


군대 전령사 교육 때 자주 회자되는 고전 유머가 있다. 전령병 훈련이라며 조교가 첫 번째 훈련병에게 다음처럼 귓속말을 전한다.

     

땅 파놓았으니 묻지 마라.”     


이 말을 전해 들은 훈련병은 다음 훈련병에게도 귓속말로 전달한다. 마지막 열 번째 전달받은 배고픈 훈련병은 조교 앞에서 이렇게 복창한다.

     

빵 타놓았으니 먹지 마라.”                





난센스 퀴즈다. 알파벳 ‘A’로 시작해서 ‘A’로 끝나는 운동은? 


고딩 체육시간에 유도 과목이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유도 선수였던 선배가 유도부 모집을 위한 홍보를 시작했다.


유도는 힘으로만 하는 운동이 아니다. 유도의 ‘유’ 자는 부드러울 ‘柔’ 자로서 순발력과 강한 정신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다,라고 홍보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유도는 예의로 시작해서 예의로 끝나는 운동이다.

 

선배의 강렬한 메시지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헤비급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의 아포리즘을 떠올렸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


물리적인 힘은 약하지만 부드러움과 순발력 그리고 정신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이후 방과 후 나는, 도서관 대신 유도부 매트에서 땀을 흘리며 1학년을 보냈다.     


1학년 체육 필기시험에서 ‘유도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주관식으로 출제된 적이 있었다. 훗날 체육 선생님(유도부 사범)의 비하인드에 의하면 이렇게 답을 쓴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유도는 A로 시작해서 A로 끝나는 운동이다.” 

앞선 난센스 퀴즈의 정답은 유도였다.

      


일상에서도 와전된 발음으로 인해 난처한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외국에서 전화 예약을 할 때가 그렇다. 이럴 땐 포네틱 알파벳(Phonetic alphabet)을 사용하면 해결된다. I와 Y, B와 V처럼 비슷한 발음 구분을 위해 만든 포네틱 알파벳은 ICAO(국제 민간항공기구)에서 정한 구문 통화표다. 항공 무선뿐만이 아니라 콜센터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데 일상에서 사용하면 편리할 것이다.       



로미오 골프 골프(RGG)     


포네틱 알파벳을 알게 된 것은 나의 마지막 총각 시기를 야밤까지 코피 터지게 쏘다닐 때였다. 직장 동료 중에 아마추어 햄(HAM) 무선사가 있었다. 타워크레인 기사이기도 했던 그의 주소지는 경기도였다. 직장 때문에 광주로 단신부임을 한 것이다.     


동료 직원은 퇴근 무렵이면 전산실에 자주 들렀다. 사고무친한 광주에서 퇴근 후 시간이 외로웠었나 보다. 우리는 드라이브 삼아 무등산으로, 내장산으로, 지리산으로 내달리며 여친없는 총각의 외로움을 서로 달랬다. 술을 마실 경우에는 차박까지도 하였다.      


그때 나에겐 승용차가 없었지만 그에겐 승용차가 있었다. 그의 승용차에는 2미터 높이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고, 트렁크 뒷면엔 RGG라는 알파벳이 아크릴로 붙여져 있었다. 그는 햄무선사끼리 콜사인을 주고받을 때 '로미오 골프 골프'를 자주 외쳤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RGG는 그의 무선호출 ID였고 ‘로미오 골프 골프’는 포네틱 알파벳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총각의 외로움을 서로 불태울 때 내가 먼저 맞선 후 결혼을 하고 예상치 못한 IMF가 찾아왔다. 근무회사가 와해되면서 나는 다시 일본으로 직장을 옮겼고, 그는 부모님의 주소지로 돌아갔다. IMF가 끝나고 광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소식은 암울했다. 이혼과 사업실패를 겪고 어느 산속의 절로 은둔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당시 그에게 ‘고독한 사냥꾼’이라는 애칭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아내에게 프러포즈하던 날, 그는 고독한 사냥꾼이 되어 나의 프러포즈 순간을 멀리서 고독하게 지켜본 산증인이다. 프러포즈가 끝나고 레스토랑을 나설 때 누군가가 계산을 해 놓았기에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구석에서 고독한 사냥꾼 혼자 와인을 마시며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20여 년이 흘렀다. 주변에서 그의 소식을 아는 이가 없다. 고독한 사냥꾼이 그립다. 그를 호출해 본다. 


'여기는 킬로 양키 부라보(KYB), 응답하라! 로미오 골프 골프(RGG).'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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