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 갈 때는 주로 마지막 비행기를 타는 편이다. 출발지가 광주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늦은 밤 도착하여 이자카야 특유의 조명에 젖어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 봄날이었다. 인천공항서 일본 나리타행 마지막 비행기를 탔다. 기내식사 후 캔맥주 2개를 마시고 식곤증에 잠시 졸다 보니 도착안내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밤 10시가 넘어 나리타 공항에 착륙했다. 맥주를 마셨기에 화장실에 가야 했고, 간 김에 개운하게 양치까지 했다. 노모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까지 마치고 익숙한 입국심사장을 향해 걷는데 복도까지 줄을 선 여행객이 보였다. 6년 간 일본을 다니면서도 여태 본 적이 없었던 광경이었다. 연휴도 아닌데 웬일로 붐비지? 라며 대수롭지 않게 맨 뒷줄에 섰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로부터 3시간이 지나서야 입국심사장을 통과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 나리타공항에서 입국심사를 받은 맨 마지막 사람이었다.
과정은 이랬다. 그날 나리타공항에는 세계의 입국 항공들이 우연히 그 시간대에 몰렸던 것이다. 그날 나의 입국 체류 자격은 IT 개발자 취업비자였다. 취업비자를 받으면 구약소(구청 또는 동사무소)에서 지문날인을 하고 외국인등록을 한다. 요즘은 공항 입국심사 때 외국인 등록과 동시에 플라스틱 등록증까지 발급해 준다. 그런데 하필 내 마지막 순서에서 외국인등록 서류양식이 바닥난 것이다. 입국심사 줄도 늦게 섰고, 입국 심사관이 구하러 간 서류양식을 기다리다 보니 그날 나리타공항의 맨 마지막 입국자가 된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추구의 플롯’을 이야기했다. 추구의 플롯이란, 목적하는 것을 이루지 못해도뜻밖의 사실에서 다른 배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즉, 여행의 성공 못지않게 여행의 실패도 여행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입국심사를 위한 세 시간의 기다림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서류양식이 바닥났다는 말에도 짜증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나리타 공항에서 마지막 입국자가 되는 과정과 난생처음 노숙의 경험을 즐기는(?) 추구의 플롯과 같은 맥락이었던 것 같다.
지인이 일본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첫 번째 미술관 감상을 마치고 두 번째 장소에 도착하고서야 미술관에서 산 굿즈를 놓고 온 것을 알았다. 폐관 시간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서둘러 야간 경비실로 찾아가 다음 날 첫 비행기로 출국한다는 하얀 거짓말을 하고, 분실품 창고에서 기어코 굿즈를 찾아왔다. 대신 지인의 그날 여행 일정이 흐트러져버렸다. 미안해하는 나에게 이것도 에피소드가 되는 것이니 괜찮다고 지인은 나를 위로했다. 추구의 플롯인 셈이었다.
일본국립신미술관
난생처음 기대하고 갔던 파리 여행의 1차 목적지가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그렇지만 입국한 다음날인 ‘13일의 금요일’에 발생한 파리 테러로 오르세 미술관은 입장조차도 하지 못했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크게 상심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군기자처럼 테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고 싶었다. 여행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테러로 희생된 추모의 장소에서 세계의 여행객과 함께 직접 묵념을 올렸다. 이 또한 추구의 플롯으로 기억된다.
파리 테러 추모 (2015)
마지막 입국자라는 경험이 대단 것은 아니었다. 평상시 입국 때와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 입국 심사를 받고 게이트를 나오니 항공사 직원이 퇴근도 못 하고 나의 캐리어를 들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입국 심사가 끝나지 않으면 항공사 지상직원도 퇴근을 못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항공사 지상직원에게 재차 삼차 죄송하다는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캐리어를 끌고 입국장 출입문을 향하는데 나의 발자국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를 담당했던 입국 심사관이었다. 서로를 계면쩍게 바라보며 수고했다는 대화를 나누며 걷는데 등뒤로 전등이 하나 둘 꺼졌다. 아마도 야간 경비가 우리의 동선을 보며 소등 스위치를 하나 둘 조작하는 모양이었다.
새벽 1시. 전철은 이미 끊겼고 나리타에서 도쿄 숙소까지 택시를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근 호텔이나 공항 내 캡슐 호텔이 있었지만 4시간 후면 전철이 운행되기에 숙박하기도 어중간했다. 처음으로 공항 바닥에서 노숙하는 경험을 했다. 비즈니스 관계로 여권 네 권이 꽉 차도록 도쿄를 드나들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난생처음 노숙의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공항 근무자들은 입국심사가 지체되었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물과 간식 그리고 슬리핑백을 제공받으며 손님 대접을 받았다. 다음 날 기상을 했을 때 잠자리가 불편했다는 느낌도 없었다. 훗날 글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에 방점을 두어서인지 짜증도 일지 않았다.
추구의 플롯은 여행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리라. 일상에서 일어나는 내면과 외면의 과정이 추구의 플롯으로 쓰인다면 보다 의연한 여유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