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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Sep 25. 2023

영원의 이데아가 주는 위안

조용히 Sinead O'Connor의 노래 <A Perfect Indian>을 감상하고 있다. 월요일이면 항시 무언가 분주했지만 오늘은 새들이 떠나간 숲처럼 적막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아직 거래처 컴플레인 전화조차도 없다.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문자로 접수된 프로그램 수정 건이 있나 확인하려는 순간, 문자 알람이 울린다. 딸아이가 보내 준 커피 두 장 선물권의 유효기간이 끝나간다는 메시지이다. 유효기간 연장을 하면서 생각에 잠긴다. 커피숍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셔본 게 언제였던가. 미간에 힘을 주어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곧장 떠오르지 않는다.


(유튜브) A Perfect Indian

https://youtu.be/hACTtKzFrvg?si=gkFPzhXRRao_0eiu



이런 날엔 무등산 자락에 있는 소쇄원을 거닐며 일광욕이라도 하고 싶다. 다녀오는 길에 호젓한 갤러리에 들러 그림 감상을 하고 싶다. 하지만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이런저런 공상에 잠기며 시간을 보낸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도록을 펼쳐보거나 단조의 음악을 듣다 보면 시나브로 평소의 마음으로 돌아오지만, 오늘은 왠지 마음의 고요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공허하다고나 할까? 자기 최면이 필요한 순간이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철학 이론으로 마음을 다스려본다.     


후설의 현상학은 선험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눈에 보이는 형이하학적인 사물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는 눈에 보이는 현상적 사물은 인정하지 않는다. 외적인 세계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간 사라지고 마지막엔 형이상학적인 영적 사물만 남는다는 것이다. 다정도 病 인양 하여 짧은 생애를 마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의 그림에서도 플라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손가락은 현상학에 가까운 자연과학을 가리키지만 플라톤의 손가락은 여전히 관념적인 외적 세계를 가리킨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의 일부



나는 현실주의자다. 내 삶의 우선순위는 전력투구였고 결과는 후순위였다. 무조건 들이대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서두르며 살아왔다. 결코 외적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생각이 바뀌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현상학의 실체 또한 결국에는 장자가 이야기하는 한여름 날의 꿈인 호접몽일지도 모른다. 지금 순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비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현실세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가족이든 타인이든, 사랑이든 증오든. 그래서일까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변하지 않는 대상을 꿈꾼다. 하지만 허황된 꿈이라는 것을 직시한다. 어쩌면 이기적인 바람일 수도 있다. 그러니 관념적인 사상으로 생각을 바꾸어 볼 수밖에. 추상적인 것이라도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이데아의 세계. 영원불변의 마지막 진리라고 여겨진다. 종교인이 내세의 믿음을 갖듯이 나도 이데아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자기 위안을 가질 때가 많다. 코미디 대사처럼 '공짜의 위력'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잡다한 욕망 중에 '관계'의 애증처럼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이 있을까?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다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런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詩가 있다. 이정하 시인은 어떤 분위기에서 이 詩를 썼을까. 욕망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멋진 시다.


                                  - 이정하     


그대 굳이 아는 척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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