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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Jun 30. 2019

허구는 삶을 견디게도 한다던데

나의 방향타는 지금 제대로인가

  서점을 향하는 장맛비 속으로 우산을 묶는 끄나풀이 내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우산의 손잡이를 돌리다가 불쑥, 나의 방향타는 지금 제대로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전략은 불변이지만 전술은 수시변동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최면을 걸며 오늘을 살아간다. 시행착오에 대해 관대함을 유지한 채 임기응변으로 살고 있다. 순발력이라는 미명하에. 속도보다 방향에 비중을 둔다고는 하지만 자주 방향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다. 집시적인 마음의 방향은 아직도 허공을 떠도는 것 같다.


나의 방향타는 좌측의 사진일까, 우측의 사진일까.

  

첫 직장 입사부터 오늘까지의 직장을 반추해 본다.  


 1.백화점 전산실 (서울 2.5년)

 2.日本 IT SW개발 (도쿄 3.5년)

 3.건설사 전산실 (광주 5년)

 4.日本 IT SW개발 (도쿄 2년, IMF기간)

 5.소기업 (광주 1년)

 6.창업 (IT SW개발) (광주 11년)

 7.日本 IT SW개발 (도쿄 1년)

 8.재창업 (IT SW개발) (광주 현재)


  직업적으로는 IT 프로그래머로서의 30여 년 외길이다. 경제적 내실을 기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샐러리맨 시절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었다. 어느 날 찾아온 IMF는 뒤늦게나마 미래를 계획하게 했지만 부조리한 세상 탓만을 외쳤다. 세상은 이런 것이다, 라는 현실을 직시했을 때는 마이너리거가 되어 있었다. 흔들리는 삶의 철학에서 값싼 낭만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가끔씩 공상에 빠져 길 잃은 내 자신을 발견한다. 허무함에 침잠될 때다. 세상은 나에게 긍정의 기운으로 살아가라 하지만 나는 어쩌면 아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허무를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나는 매사가 너무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질투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살아온 현실은 언제나 반은 허구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야수들의 밤 - 오시이 마모르>


  현실의 반이 허구라고? 다시 또 내 자신과 타협을 한다. 허무를 허구로 바꾸면 어떨까. 위작 화가는 창의력이 퇴보하지만 모작 화가는 창의력이 진보한다는 말이 있다. 허위가 위작이라면 허구는 모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허위는 방향성이 없지만 허구는 그래도 희망처럼 일말의 방향성이 있다.

  희망. 희망이라. 무슨 희망일까? 이제 판도라 상자의 최후 보루라는 희망을 끄집어내야만 하는가?


  판도라를 떠올리니 에피메테우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인간을 사랑했고 '먼저 생각한다'는 프로메테우스를 좋아했다. 이제는 그의 동생인 에피메테우스도 자주 생각한다. 에피메테우스는 '나중에 생각한다'는 의미의 신이자 판도라의 남편이다.

   최선이라는 '먼저'의 기회는 놓쳤을지언정 차선이라는 '나중'의 기회라도 판도라의 마지막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이처럼 다행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 그래서일까, 요즘은 프롤로그(프로메테우스)보다 에필로그(에피메테우스)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을 느낀다. 자기위안이겠지만.    


  최선이 아니면 차선도 방법이다. 허구의 방향성이 희망이 되면 삶을 견디게 할 것이다. 불행의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 남은 것은 그래도 희망이지 않던가.


허구가 오해를 부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삶을 견디게 한다.
<소설의 첫 문장 - 김정선>


아제베의 일상에세이는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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