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젊음
"얼른 일어나!!!, 학교 늦는다!!!"
귀를 파고드는 엄마의 고함소리.
시끄럽다.
"아, 알았다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아침 1교시를 집어넣은 건지, 아침마다 후회를 반복한다.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가니 맛깔스러운 된장찌개가 기다리고 있다. 어제 먹은 술이 다 깨지 않아 속이 쓰렸는데, 흰쌀밥에 된장찌개를 덜어 비벼 먹으니 속이 좀 나아진다.
엄마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스쿨버스를 타러 가는 길.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살살거리며 불어대는 바람이 기분을 업 되게 한다. '카톡' 소리에 휴대폰을 보니 오늘 저녁에도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연락이다. 무시하려는 찰나
'희진이도 온다는데?'
그 말에 바로 'ㅇㅋ'를 때렸다.
강의실에 도착해 수업을 듣는다. 아침엔 그렇게 짜증이 났는데 의외로 1교시 수업은 집중도가 높다. 2시간의 수업을 마친 후 짧은 공강시간 친구들과 뒤뜰에서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영수 녀석이 나이트에서 까인 이야기, 동기 두 명한테 고백을 받은 범수의 이야기, 여자친구에게 꽉 잡혀 살면서도 늘 좋아서 히죽히죽 대는 보환이의 이야기 매번 비슷한 이야기지만 언제나 재밌다.
이야기는 저녁 술자리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희진이도 온다는 말에 바로 칼답을 한 나를 놀리는 녀석들의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입으로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얼굴이 벌게지는 걸 느낀다. 사실 좋다. 요즘 삶의 낙은 희진이를 보는 것이다.
동아리에서 처음 만난 희진이에게 처음부터 호감이 갔던 건 아니었다. 짧은 단발에 진한 흑발, 한국인스러운 작은 눈에 깨끗한 피부를 가진 희진이는 여자치고는 제법 큰 키에 살짝 마른 체형이었다. 전형적인 미인형은 아니었기에 크게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었다. 희진이는 매사에 무심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쉽사리 끼지 않았고, 지그시 바라보는 쪽에 가까웠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단 남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그러다 시간이 되면 자신의 일정에 맞춰 훌쩍 사라지곤 했다.
집단에 속해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느낌. 그 느낌이 좋아 몇 번 눈여겨보게 됐고, 어느새 좋아하는 감정까지 생기게 되었다. 실제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눠보진 않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점심을 먹고 가장 힘든 오후 수업을 버텨낸 후 드디어 술자리. 학교 뒤편에 있는 학사주점에서 약 10명 남짓한 인원이 모여 과일 막걸리에 파전을 시켜 먹었다. 아쉽게도 희진이는 가장 먼 쪽 테이블이었다. 어차피 가까이 있더라도 맨정신에는 말도 잘 못할 것 같아 잘 됐다는 생각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과 곧 있을 중간고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소엔 수업도 잘 안 듣던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었고, 가장 공부를 성실하던 범수가 시험범위며 주로 공부해야 할 부분에 대해 알려주었다.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자 이야기는 늘 그러듯 '연애사업'으로 바뀌어있었다. 이 시간만 되면 사랑하는 이가 있지만 아직 맺어지지 않는 자는 '학생'이, 이미 연인이 있거나 솔로인 이들은 '선생'이 되었다. 학생이 자신의 마음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면 선생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생각이 '정석'인 양 열심히 강의를 시작했고, 학생들은 열심히 끄덕인다. 학생들 중 몇몇은 시킨 대로 했다가 대부분 파국을 맞이하거나 낮은 확률로 잘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강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이 결과도 마찬가지로 파국이 대부분에 낮은 확률로 잘 된다. 이런 걸 보면 대부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이였기에 강의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희진이 테이블을 힐끔거리다 빈자리가 생긴 걸 보고는 자연스럽게 희진이의 대각선 자리를 차지했다.
"희진아 오랜만이다."
"어, 근데 우리 이틀 전에도 보지 않았나?"
옅은 미소와 함께 담담하게 대답하는 희진.
테이블에 같이 앉은 친구들이 재밌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 나는 이틀이면 오랜만으로 생각해서, 그치 애들아?"
영수와 보환이가 '뭐래냐?'라는 표정을 짓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 어! 얘가 하도 사람을 좋아해서 이틀 만에 만나도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더라고. 우린 어제 봤는데도 아까 낮에 오랜만이라고 했잖아? 그치?"
영수의 혼신의 힘을 다한 도움을 보고는 희진과 그 옆에 앉아있던 지현이가 피식 웃었다. 내 마음도 피식 두근거렸다.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영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낮에 했던 나이트 이야기를 더욱 실감 나게 하기 시작했다. 희진과 지현은 물론 그 옆 테이블에 앉은 애들까지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다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
그러는 동안 희진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나는 몇 번 눈을 마주쳤고, 그때마다 놀라 눈동자를 휙 돌리던 나와 달리 희진은 아주 여유롭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 태도마저 우아하게 느껴졌다.
어느덧 10시가 되었다. 버스 막차시간을 놓쳐선 안되는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안에 희진이도 있었다. 마음 같아선 정류장까지 같이 가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도 있는데 오버하는 느낌이 들어 참았다.
그렇게 갈 사람들 가고 남은 사람들끼리 남고 보니 오늘 공강시간에 이야기를 나눴던 3인방과 아까 희진 옆자리에 앉았던 지현이다.
"아주 광고를 해라 광고를. 나 좋아 뒤지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아니 적당히 쳐다봐야지, 사람 얼굴 뚫리겠네."
갑자기 얼굴이 벌게지는 게 느껴졌다.
"오버하지 마 새끼들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버럭 짜증을 냈다.
"오버?? 야 지현아 말 좀 해봐, 얘가 우리의 진솔한 피드백을 받아들일 생각을 안 한다."
영수가 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귀엽더만"
지현의 말에 3인방은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동시에 '희망'으로 가득 찼다. 지현이도 여자니까 희진이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매우 논리적인 생각'이 나를 들뜨게 만든 것이다.
씨익 웃는 나를 보고는 지현이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근데, 희진이는 마음에 드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던데?"
쿵.
3인방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보따리를 발견한 것 마냥 실실거리며 누구냐고 물었다.
"에이, 맨입으로?"
2차로 가는 길, 왁자지껄한 무리 속에서 억지웃음을 짓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절망만 안겨줄 이야기를 듣기 위해 꿋꿋이 걷고 있는 나는 고민한다. 이 독배를 마시지 않고 발걸음을 돌려 모르는 채 살아갈지, 짧은 상쾌함과 거대한 고통을 줄 잔을 들이켤지.
결론은 뻔한 거 아니겠는가?
한국인이라면 국룰인 '못 먹어도 고!'
나는 오늘도 그렇게 '젊음'을 소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