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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다언니의 말맛 Feb 20. 2022

#09. 작가의 숨은 의도를 찾는 국어수업은 무엇을

'눈치'는 여우를 할퀸다.


#09. 작가의작가의 숨은 의도를 찾는 국어수업은 무엇을 위해서였나? 

'눈치'는 여우를 할퀸다.



#01. 우리 집 모스 부호, "쿵쿵쿵"


어릴 적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벽은 심부름을 위한 소통수단이었다. 


'쿵쿵'


'쿵쿵쿵..'


"어?"


귀가 번뜩인다. 나는 안방에 있는 언니에게 달려간다. 


"왜에?..."


"응, 여우야 나 물 한잔만" 


"응~"


임무수행 완료!!



'쿠웅~쿠웅~'


무겁게 들린다. 건넌방으로 달려간다.


"왜에? 불 끄라고?"


"응! 어떻게 알았지?"


흠칫 놀라는 언니의 반응을 보며 내심 뿌듯했다.



'쿵, 쿠웅~, 쿵'


"응! 수건 여깄떠, 큰오빠"


"어떻게 알았어?"


큰 오빠는 칭찬과 함께, 오백 원을 손에 쥐어준다.


벽 두드리는 소리도 모두 다르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지쳤다. 나는 조금씩 순진함에서 벗어나며 때가 묻기 시작한 걸까?


'콩콩콩'



'콩.. 콩... 쿵... 쿵'


이 소리는 작은오빠 소리다.


'콩... 쿵... 쿵!!'


못 들은 척한다. 이내 작은오빠의 괴롭힘이 시작된다. 속상함은 울음으로 마무리된다. 언니나 엄마가 있어야 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생을 괴롭힌다며 작은오빠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아, 고소하다.'



#02. 눈으로 말해요.


2남 2녀의 막내인 나와 작은오빠는 엄마를 닮았다. 신기하게도 부모의 단점만 고스란히 유전되었다. 아마도 엄마는 셋째와 넷째까지 임신했을 때, 아빠를 무척이나도 싫어했나 보다. 반면 큰오빠와 언니는 아빠를 닮았다. 쌍꺼풀이 크고 눈이 컸다. 같은 형제인데도 큰오빠와 언니, 나와 작은 오빠의 분위기는 달랐다. 큰오빠와 언니는 인형같이 이쁘고 똘똘하게 생겨 친척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나는 눈물이 많아서 별명도 가지가지였다. 엄마와 안 떨어지고 징징된다고 누가 지어줬는지는 모르지만 <울심>이란 별명도 함께했다. 처음 고백하는 별명인데 여전히 듣기 싫다. <울심>이가 뭔가... <울심>이가... 젠장!

사실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척 어른들은 나의 이름 정이와 울심 이를 합쳐 <정심>으로 알고 있기도 했다. 이 가명은 더더욱 싫었다. 이렇게 기억된 친척들이 청소년 시절에도 <정심>으로 불릴 때면 난 대답하지 않거나 삐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 모습이 재밌는지 한바탕 웃기도 했다. 


아빠, 큰오빠, 언니의 공통점은 눈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어릴 적은 그런 소통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벗어나고 중학교에 올라가니 세 사람의 눈만 봐도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상황들이 억압으로 다가왔다. 눈빛과 눈동자의 흔들림으로 감정을 읽었어야 했고, 그들의 컨디션을 살펴야 했다. 성인이 돼서야 분위기를 읽어야 하는 상황에 그동안 쌓였던 감정들이 폭발할 때도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엄마가 아닌 아빠가 있었다. 집에 오면 아빠 심부름을 해야 했다.  담배 심부름과 소주 심부름. 가장 하기 싫은 심부름이었다. 아빠도 내가 심부름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알았는지 눈에 힘을 주며 시키거나, 동정심을 가득 싫은 눈빛으로 심부름을 시켰다. 눈빛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시는 아빠가 무서워서라도 나는 눈으로 말하는 아빠의 감정을 알아차려야만 했다. 큰오빠와 언니도 눈빛 공격의 달인이었다.

작은오빠와 나는 지극히 누가 봐도 아시아인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 낮은 코까지... 엄마의 백옥 같은 피부색이라도 좀 물려주시지... 쳇! 나만큼은 만만했던 작은오빠가 눈으로 말하기라도 한다면, 나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공격 자세를 취했다. 우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투사처럼 끝까지 저항했다. 단, 엄마나 언니가 있을 때만 말이다. 안 그럼 아무도 모르게 깐죽거림으로 맞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인지 내공이 쌓인 나는 눈으로 말하는 대화에 어리바리하기 시작했다. 일찍 잠이 들었던 나는 우연히 언니와 엄마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엄마! 여우가 변했어. 예전 내가 알던 착한 동생이 아니야"


"그러게, 사춘긴가 요즘 말을 안 듣더라"


내 전략이 통했나? 그 이후로 눈으로 말하는 그들의 반응에 못 알아듣는 척했다. 우리는 입이 있다. 말로 하면 되는데 눈빛 공격은 나에겐 늘 트라우마로 남았다.


<눈치>는 영어로 해석할 수 없는 단어다. 유독 중.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작가의 숨은 의도>를 왜 그렇게 찾아 헤맸을까? 눈치가 빨라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선생님의 배려였을까? 눈치껏 작가의 숨은 의도를 찾아야 했다. 


눈은 서로 마주 보며 아이컨텍을 하기 위해 있다. 눈에 감정과 힘을 싣으면, 대화는 상처가 될 수 있다. 나도 어떠한 상황에서 상대가 싫거나 힘이 들면 눈으로 말할 때가 있다. 상대가 감정을 알아채고 눈치를 볼 때면 상처는 두배가 된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미 마음의 감정이 닫히고 나면 그 순간은 지혜롭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날은 시키지 않아도 고해성사를 한다. 나도 같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나도 같은 방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준다. 그런 날이 반복되면 나는 작아진다. 내면 아이가 숨어버린다. 


눈치 빠른 여우짓은 어릴 때로 충분하다. 상처받은 여우는 동굴에서 상처를 핥는다.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지 꼼짝하지 않는다. 남에게 같은 상처를 주면 치유할 수 없다. 어차피 나에게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더 큰 상처가 나를 잠식한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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