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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IT 컨퍼런스를 가보기 : 이탈리아 볼차노

산 좋고 물 좋은 북부의 소도시로

by 구은서

여행 전부터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유럽에서 사는 건 어떨까?' 하는 호기심 뒤에 '유럽에서 일하는 건 어떨까?'도 있었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유럽에서 열리는 직무 관련 컨퍼런스들도 찾아봤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고 나처럼 IT 프로덕트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내 관심사 범위 안의 컨퍼런스가 하나 있었는데 11월에 이탈리아 볼차노에서 열리는 거였다. 2년 전 여행 때 볼차노와 주변 돌로미티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기쁜 마음으로 바로 신청했다.


포르투에서 볼차노까지는 밀라노를 거쳐가야 했다. 포르투에서 밀라노까지 저가항공을 타고, 밀라노에서 볼차노까지는 기차를 예매했다. 포르투 공항에서야 알게된 사실은 목적지가 내가 알던 밀라노 말펜사 공항이 아닌, 밀라노 베르가모 공항으로 간다는 것... 밀라노 시내까지 차로 한시간 거리다. 다행히 30분 간격으로 공항버스가 있었다.


베르가모 공항에 도착해서 공항버스 온라인 예매를 하면서 캐리어를 끌었다. 한손으로 잘 안되서 멈춰서니 내 시야에 매표소가 보였다. 가서 "가장 빠른 버스요!" 하니까 직원이 티켓을 끊어주고 "이거 1분뒤에 출발해. 5번으로 가. 고고고!" 하는 바람에 난데없이 냅다 뛰어야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타고 버스가 바로 출발했다. 휴.


밀라노>볼차노 가는 기차는 크게 지연되지도 않고 괜찮았지만 캐리어를 둘 짐칸이 없어서 난감했다. 아무리 체크해봐도 둘 곳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24인치 캐리어를 어떻게 위쪽 선반에 올릴 것인가... 내 옆자리의 우아한 여성분이 내 곤란함을 눈치채고는 위에 올리기엔 너무 무겁냐고 물어봤다. 끄덕 하니 "우리가 같이 들면 올릴수있지 않을까요?" 하면서 같이 들어주셔서 올렸다. 마음까지 고운 그녀. Grazie mille!


IMG_3412.jpg?type=w773 밀라노 첸트랄레 역


볼차노에 도착하니 공기가 이전과는 엄청 다르게 차가웠다. 4시밖에 안됐는데 해도 꽤 기울어있었다. 맑은 공기가 느껴지고 높이가 짐작 안되는 산들이 보였다. 자연이 폭 느껴지자 진작 그냥 여기로 올걸 싶었다.


호텔에 짐 던져놓고 바로 나가서 산책을 했다. 해가 지기 전에 좀더 풍경을 보고싶었다. 근처 강가는 근처 단풍과 어우러져서 완연한 늦가을 분위기였다. 멀찍이 온 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 오기까지의 스트레스를 잊게 해주는 풍경.


강 건너에는 강 따라서 쭉 자전거도로, 산책로, 놀이터가 조성되어있고 약간 양재천이랑 비슷한 느낌이 났다. 행복해하며 걷다가 한편으로 배가 너무 고팠다. 주변 식당을 열심히 찾았으나 진짜 가고싶은 곳은 오픈이 1시간이나 남았고 다른 가까운 식당은 30분이 남아서 산책하며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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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아간 식당은 불이 꺼져있어서 한참 긴가민가했다. 안에 사람이 있길래 똑똑 문을 두드려보았다. "영업 안하나요? 지금 다섯시 반인데요.." 하니까 들어오라고 했다. 곧 쉐프로 추정되는 이탈리아인도 두 명 더 들어오고 다들 나를 흘깃 쳐다봤다. (기분나쁘진 않았고 궁금한 눈빛. 혹시 나때문에 칼출근??) 나중에 "Where are you from?" 하고 묻기도 했다. 너무 배고픈 상태여서 나도 모르게 아마트리치아나 파스타를 시키면서 디저트로 티라미수까지 같이 시켰다. 식전빵으로 자른 피자도우 같은게 풍성하게 나와서 디저트 시킨 걸 살짝 후회했으나, 먹다보니 모두 맛있어서 싹싹 다 긁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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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숙소에서 5분거리인 컨퍼런스 장소로 걸어갔다. 컨퍼런스는 Free software에 대해 매년 유럽 전체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였다. 이탈리아어로 진행했으면 못갔을텐데 영어여서 신청할 수 있었다. 시간 맞춰서 들어가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스탠딩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얘기를 하고있었다. 올해의 주제는 ‘윤리’ 라고 해서 인상적이었다. 'AI' 라던가 'AI를 어떻게 활용?' 같은게 아니라 윤리라니. 역시 유럽이다. 물론 AI에 대해 다루는 세션들도 종종 보였다.


오프닝과 이어지는 키노트 세션을 들으면서 이 컨퍼런스의 성격을 알 수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생소한 개념들을 이야기했다. (사전 조사를 거의 안해서 몰랐음) Copyleft란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구글링을 해보니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의 한 방식으로, 누구나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사용, 수정, 배포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도, 이 자유가 후속 사용자에게도 계속 유지되도록 강제하는 개념' 이라고 나온다. 그러니까 자유롭게 사용하되 수정하고 이용할땐 이용해서 개발한 것도 소스코드를 공개하고 동일한 라이선스를 적용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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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트의 스토리텔링이 훌륭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특정한 심장병을 앓고있어서 제세동기를 써야했다고 했다. 그런데 폐쇄형 소프트웨어가 내장되어있고, 일반 성인남성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장치였다. 그런데 그녀는 임신을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과 좀 다르게 '비정상' 수치를 측정해야했는데 고칠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고 했다. 만약 프리 소프트웨어가 내장되어있었다면 코드를 고쳐서 직접 패치해서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제품을 구입할 때 매뉴얼에 소스코드가 있어서 사용자로서 개선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질문으로 키노트가 마무리됐다.


세션들을 듣다보니 리눅스, Mysql 같이 개발자라면 한번 쯤 다들 쓰게되는 소프트웨어들이 copyleft 였다. 최근에 내가 접한 개발 이야기들은 '어떻게 수익화를 할지'에 포커스되어있고 이런 프리소프트웨어에 기여하는 풍경은 흔치 않아서 새로웠다. 현실적으로 이게 될까 싶기도 했는데 이런 컨퍼런스를 만들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신기하기도 했다.


어떤 세션에서는 탄소발자국 이야기를 했다. 엄청난 데이터가 포함되는 대시보드 하나를 띄우려면 수많은 네트워크 비용이 생기는데, 사용자들은 대부분 한두개 차트만 볼 뿐이다. 사용자가 조회할 때마다 더 많은 전기를 사용하게 되고, 탄소 배출량이 많아진다. 그래서 프레임워크로 그 양을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봤다..... 라고 하는데 정말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여서 멍해졌다. 사실 난 기후위기에 엄청 관심이 있진 않지만, 평소에 개발하면서 본인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프로그래밍에 최대한 적용해보려는 열정과 태도가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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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퍼런스에서 혼자 세션만 들으면 아쉬우니까... 누군가에게 말걸기를 시도해봤다. 혼자 스탠딩 테이블에서 밥먹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에게 발표자냐고 물어봤다. 엇 아니요.. 그는 오후 세션에서 발표를 한다며 간략하게 발표내용을 소개해줬다. 근처 도시에 있는 회사에서 일하는 이탈리아인이었다.


알고있지만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는데 이탈리아에 영어 쓰는 회사는 잘 없다고 했다.. 아주 작은 스타트업들 중에 외국인들도 채용하는 회사를 들어보긴 했다고. 그가 사는 도시, 복지, 원격근무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배고파져서 점심 받아오겠다고 말하고 다녀왔더니 사라져있었다. 나중에 그의 세션에서 다시 만났다.


점심을 혼자 먹기 아쉬우니까... 또 다른 사람의 테이블에 조인하게 되었는데, 발칸반도의 어떤 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컨퍼런스 운영팀 사람이었다. 개발자는 아니고 연관된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네트워킹 목적으로 왔다고 했다. 이 사람은 다니고있는 회사가 호주 회사였다. 풀리모트로 근무한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job을 찾았냐고 물으니까 리모트 근무가 너무 필요해서 검색을 열심히 했다고. 그래서 이탈리아에 살면서 호주에 있는 회사를 다니게 된 엄청난 특이 케이스였다. 나는 주변에 아무런 레퍼런스가 없는 케이스를 별로 도전할 생각을 못하게 되는데,, 이 사람을 보며 만들기 나름, 해보기 나름인 거 같단 생각을 하게 됐다. 특히 해외취업을 생각한다면 이런 마인드가 필요할 것 같다.


다양한 주제의 오후 세션들을 충분히 듣고 마지막 세션까진 안듣고 좀더 일찍 나왔다. 심지어 2일차 세션들도 있었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년 하는 컨퍼런스여서인지 전체적으로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이메일로 변경사항 공지도 과할 정도로 하고, 컨퍼런스를 위한 앱까지 따로 만들어져있어서 참석자로서 풀 서포트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큰 행사를 기획한다면 떠올려서 레퍼런스 삼아보고싶다. 여러모로 새롭게 배울 점도 많아서 든든해진 마음으로 나왔다. 다만 '유럽에서 일하는 건 어떨까?' 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모르겠고,,, 앞으로의 여행에서 더 알아보고 이야기해볼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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