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숨어있는 사랑의 도시 : 이탈리아 베로나

by 구은서

베로나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쯤에 있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다. 볼차노를 갈 때 밀라노에서 출발해 베로나에서 환승을 했었다. 베로나 자체가 기대되기보다는 이탈리아 여행 동선이 북부 -> 남부였고 당일치기 가능한 가르다 호수도 보고 싶어서 머물게됐다. 알고보니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배경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깡시골마을에 가까운 메란에 있다가 베로나역에 도착하니 사람이 엄청 많아보여서 불안감이 기어올라왔다. 아.. 다시 소매치기를 조심해야겠구나. 메란에서 계속 독일어를 듣다가 베로나 가는 기차에서부터 쭉 이탈리아어를 듣고있노라니 진짜 이탈리아에 온 실감이 났다. 듀오링고 앱으로 이탈리아어를 110일째 가볍게 공부한 실력(?)을 본격 써먹을 생각에 신이 났다. 최소한 표지판에서 가끔 아는 단어를 포착하고 '영어 말할 줄 아세요?' 라고 이탈리아어로 말할 수 있었다... 완전 모르던 언어를 배우니 이렇게 작은 것에 기뻐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저녁에 도착한 숙소의 호스트는 따듯하게 맞아주면서 맛집 추천도 해줬다. 추천 맛집을 가려고 걷다보니 아디제 강가를 걷게 되었다. 깜깜한데 어쩐지 무섭지 않고 무드있었다. 강가와 다리에서 키스하고 있는 커플들도 보였다. 평소라면 썩 좋아하지 않는 모습인데 이 도시의 인상이랑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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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베로나카드'에 대한 안내 리플렛이 있었다. 27유로에 24시간동안 주요 명소와 대중교통 무제한. 이걸 사서 끌리는 곳들 다 들어가봐도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시작해 베로나카드 투어가 시작됐다. 고대에 지어졌는데 지금도 매년 여름 오페라가 열리는 아레나, 카스텔베키오 뮤지엄, 줄리엣의 집, 두오모 등등 내 위치에서 가까운 순으로 다녔다.


베로나카드를 정말 잘 샀다고 생각한 순간은 카스텔베키오 뮤지엄에 갔을 때였다. 베키오 성 안에 지어진 박물관이었다. 유적 자체를 박물관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웃길 정도로 못생긴 고대의 조각상들로 가득한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런 다음 출구가 보이길래 '시시하네. 얼른 다른 데로 가야겠다' 하고있었는데 이어지는 안내판을 따라 가보니.. 끝이 없었다.


그림에 그렇게 조예가 없는데도 가면 갈수록 엄청난 중세시대 예술 작품들에 놀랐다. 성경 이야기를 쭉 말풍선 없는 만화처럼 칸칸이 나열해둔 그림도 있고, 16세기의 윌리엄 키 라는 화가가 그린 어떤 초상화는 자세히 볼수록 사람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너무 익살스러워서 눈앞에 있는데도 AI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림도 있었다. 관람 동선 중간에 성 위에 올라가 뷰를 감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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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애매하게 배가 고파서 대충 길거리음식을 먹고싶었다. 마침 보이는 작은 가게가 있어 가까이 가보니 아란치니를 팔고 있었다. 바로 데워주셔서 딱 하나 있는 스탠딩 테이블에서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볶음밥 같은걸 주먹밥 모양으로 튀겼고 안에는 뭔가 토마토 피자소스가 있었다. 천천히 먹으면서 다른 아저씨 손님이 이탈리아어로 하는 이야기도 드문드문 들었다. 가게 주인이 시칠리아 사람이라고 하니 손님이 자기도 시칠리아 가봤고 팔레르모랑 어디어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나한테 맛있냐고 물어보셔서 '응 완전 굳임' 하니까 유쾌하게 가게 주인에게 전해줬다.


일몰 시간에 맞춰 산피에트로 성 앞에 도착했다. 베로나 전경이 다 보이는 곳.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그라나다 니콜라스전망대에 비하면 고요한 수준이었다. 비집고 들어가면 얼마든지 명당에 앉아서 일몰을 볼 수 있는. 이곳 저곳에 앉아보며 일몰을 기다렸다. 유독 사진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인 사진 잘찍는거 소문 났나.. 심심해보였나..) 이탈리아 소녀들을 찍어준 뒤엔 나도 부탁해봤는데 내가 한 것처럼 엄청 연사로 여러장 찍어주고 마지막엔 유쾌하게 인사하며 손으로 쪽~ 하고 갔다.


완전 일몰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엔 흐르는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풍경을 즐겼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색, 아디제 강과 온통 붉은 지붕의 건물들, 중간중간 솟아있는 탑들. 앉아있는 돌 앞에 새겨놓은 낙서 문장이 보였다. 번역기를 돌려보니 '사람들이 그러는데, 내가 너에 대해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인대' 였다. 아까 사진찍어준 소녀들이 썼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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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카우치서핑으로 연락하게 된 에마누엘레 라는 사람과 약속이 있었다. 프로필에 정보가 별로 없어서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걷기로 했으니 큰 문제없겠지 싶어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를 처음 봤을 때 내 인상은 '오왓 완전 아저씨잖아' 였다. 패딩을 목끝까지 잠그고 굉장한 속도로 걸었다. 공무원이라고 했고, 예술을 좋아해서 언젠가는 문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아란치니 가게에서 만난 아저씨같은 호방함과는 반대로 꼼꼼하고 일도 제대로 할 것 같은 사람. 나와의 시간도 뭔가 베로나의 예술성을 잘 보여줘야지_라는 마음으로 나온 것처럼 보였다.


만나자마자 같이 걸어간 곳은 에르베 광장이었다. 에마누엘레는 탑 근처 벽 앞에서 멈춰 서더니, 요상한 얼굴이 새겨진 돌을 가리켰다. 입에 손 하나쯤 들어갈 구멍이 나 있었다. 중세 시대때는 여기에 편지를 넣었다고 했다. 고리대금업자나 불법 계약을 익명으로 고발하는 곳이었다고. 얼굴 위에는 라틴어로, '어떤 종류의 고리대금이든 비밀리에 고발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낮에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곳이었는데 숨은 포인트가 있었다.


조금 더 걸어서 단테 동상이 있는 광장으로 갔다. 동상 뒤 아치 위에 작은 석상이 하나 있는데, 공을 들고 있다고 했다. 정말 정직한 사람이 그 아래를 지나가면 공이 떨어진다는 전설이 있단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 번도 떨어진 적은 없다고. 그래서 아직 아무도 정직하지 않다는 뜻이라고, 그가 슬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누가 지어냈을까? 참 시적이다.


베로나 중심부 곳곳을 다니며 낮에는 전혀 몰랐던 스토리들을 들었다. 저녁을 같이 먹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아레나 즈음에서 몇 가지 궁금했던 질문들을 묻다가 헤어졌다. 함께한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을까.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뭘 바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성심껏 베로나를 보여주다니. 그가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 요정은 가끔 아저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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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를 다시 간다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가자


명소

- 산피에트로 성 앞 : 일몰 보기

- 가르다 호수: 찾아보고 시르미오네 아닌 가르다 호수 주변 동네 가기. 시르미오네는 너무 관광지화되어서 한번으로 충분했다


맛집

- Antica focacceria Siciliana Giannone dal 1963 : 아란치니 맛집!

- Terracotta - gastronomia vegetariana : 테이크아웃 - 구운 야채 등 비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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