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듣게 된 임윤찬의 피아노 : 이탈리아 로마

by 구은서


로마는 2년 전에 처음 가봤고 이번이 두번째였다. 딱히 여길 사랑해서 다시 간 건 아니고... 여행 계획을 짤 무렵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으로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중학생 때 장난스럽게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치는 영상을 봤다. 행복해보이는데다 듣기에도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돌려봤다. 문득 생각나서 AI에게 유럽에서 11월에 하는 임윤찬 공연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로마에서 공연이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예매한 뒤 이탈리아 일정을 공연을 중심으로 조정했다.


대도시인 것 치고 로마는 친절하진 않다. 북적북적한 지하철에서 내려서 지상으로 올라갈 때는 오로지 계단밖에 없었고, 숙소까지 5분 거리인데 캐리어를 끌기 힘든 돌바닥이라 훨씬 길게 느껴졌다. 숙소도 현관에서 숙소가 있는 층까지 진입이 쉽지 않았다. 이런 게 유럽의 디폴트이긴 한데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더더욱 짜증났다. 숙소에 도착하니 힘이 없어서 널부러져 있었다. 그동안 거의 매일 2만보 쯤 걸었지만 오늘은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숙소 창문 밖으로 밝은 햇살에 비친 나무와 초록빛 테베레 강이 보였다. 햇살이 이렇게 좋은데,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보르게세 공원까지라도 가서 돗자리 펴고 누워서 쉬자- 라는 마음으로 힘을 내서 밖으로 나섰다.


보르게세 가는 길에 포폴로 광장이 있어서 들러보았다. 도착하니 너무 굉장한 크기의 광장이어서 '헐 지난번엔 왜 안왔지?!' 싶을 정도였다. 넵튠 분수에서 시작해서 더 들어가니 커다란 오벨리스크 기준으로 성당 두개가 나란히 있고 다른 방향엔 보르게세공원, 커다란 문(찾아보니 포르타 델 포폴로, 로마로 들어오는 옛 성문)도 있었다.. 잠시 압도되어 감상하고 보르게세 공원으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오르막이 살짝 있다. 올라간 다음엔 더워져서 모든 겉옷을 다 벗고 한동안 반팔로 다녔다.

View_recent_photos_2.jpeg?type=w773 보르게세 공원쪽으로 올라가서 본 포폴로 광장


보르게세 공원은 상당히 넓다. 돗자리 펼 곳을 물색하며 많은 나무들을 지나 한참 걸었다. 시에나광장이라 적힌 곳에 도달하니 여기구나, 싶었다. 거의 축구장처럼 평평하게 깔린 잔디 위에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거나 누워있었다. 그 때가 3시 경이라 햇빛이 낮게 나무그늘 없는 곳에만 드리우고 있었다. 책 읽는 사람, 연인, 강아지에게 뭔가를 던져주는 사람, 열심히 촐랑촐랑 뛰어가서 물어오는 강아지... 그들이 잘보이는 조용한 그늘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백팩에 넣어뒀던 감자칩을 꺼내먹고 누워서 책을 읽었다. 여행 중간에 꼭 이렇게 쉬고싶어서 돗자리를 챙겼는데, 드디어 처음으로 로망을 이뤘다. 배고프고 날씨가 쌀쌀해질 때까지 그렇게 보르게세 공원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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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엔 드디어 임윤찬의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장인 '파르코 델라 뮤지카 오디토리움'은 지난번 로마에 왔을 때도 더위를 피해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어서 도착하니 괜히 반가웠다. 티켓을 종이로 출력해놓고 안가져와서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 내 폰도 멀쩡했고 폰으로 보여주는 티켓도 문제없었다.


우리나라의 국보급 피아니스트의 연주라서인지 확실히 한국인들이 공연장에 많았고 내 자리 양옆으로 다 한국인 분들이 삼삼오오 앉았다. 공연장에 일찍 도착해서 앉아있다보니 사람들이 프로그램북을 사서 들어왔다. 내가 프로그램 구성을 정확히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제서야 찾아봤다... 티켓을 예매할 때 대충 보고 당연히 피아노협주곡 2번일거라 생각했는데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2번이었다. 임윤찬 피아니스트는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치는 거였다. 당황. 내가 들어본 곡인지 아닌지도 아리송했다.


첫 곡은 베르디의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서곡'이어서 피아노없이 진행되었다. 사람들이 '어 무대에 피아노가 없어 - 나중에 들여오는건가' 하며 수군수군 거리는데 한국말이어서 너무 잘들렸다. 예술의전당처럼 출입을 예민하게 통제하고 핸드폰 꺼달라는 안내 방송을 한다거나 하는 게 하나도 없이 그냥 지휘자가 들어오자마자 지휘봉 휘둘러서 시작해서 약간 놀랐다. 이렇게 해도 매너가 좋나보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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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피아노 협주곡 차례가 되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임윤찬 피아니스트가 들어오고.. 숨참고 그의 인사를 지켜봤다. 잘 안보이고 찰나여서 머리가 길구나, 밖에 볼 수 없었다. 내 자리는 무대랑 가깝지만 왼쪽사이드여서 피아노 치는 그의 손만큼은 잘보였다.


플레이리스트로 몇 번 스쳐 들은 듯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고 발랄하고, 왠지 모르게 장난감 가게가 생각난다. 보통의 클래식과는 확실히 다른 장르. 경쾌한 피아노 솔로 부분은 정말 피아노에서 또르르 옥구슬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가 어릴 때 쳤던 피아노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2악장은 보통 무드가 완전히 바뀌는데, 이 곡도 그랬다. 도입부를 듣자마자 많이 들어봤다는 생각을 했고 어디서 들었는지까지 생생하게 기억났다. 서울에서 몇 번 퇴근하고 공부할 때 너무 하기 싫어서 최대한 책상 주변을 아름답게 꾸민 적이 있다. 방의 형광등을 끄고 캔들워머의 노란 조명을 켜서 아늑하고 은은한 향이 나게 했다. 그리고 너무 잠오지도 않고 밤의 분위기도 해치지 않는 클래식을 틀어뒀었다. 그렇게 겨우 조금씩 공부하며 음악을 듣던 고독한 밤이 생각나서인지, 그걸 로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듣고있어서인지, 눈물이 났다. 배경음악으로 듣는게 아니라 오로지 음악에 집중해서 또렷하게 내 귀에 선율이 들어오고 있었다. 잔잔하면서도 마음의 격정, 고독감, 어두움, 희망을 이야기하는 선율에 큰 위로를 받았다. 심연에 있는 나의 비슷한 감정들과 맞닿아서 피아노가 대신 예술적으로 풀어주는 것 같다.


정해진 공연 프로그램 곡들이 끝나고 박수치는 시간에 임윤찬은 거의 5번정도 왔다 갔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앵콜곡을 쳤다. 가을밤에 어울리는 차분하고 외로운 선율로 시작해서 슬픈데 로맨틱한 무드로 이어지는 곡. 노래를 편곡한 거 같았는데 무슨 곡일까. 자기 전까지 반복하고 싶은 기분이었는데 느낌만 간직하며 숙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그가 한국 공연을 하고나서 검색으로 알게되었다. : 'Les Feuilles mortes(고엽)' 라는 샹송)


'슬픔'을 느끼거나 반추해본 기억이 엄청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근에는 감정을 미루고,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괜찮다'라고 말하고, 닥친 할 일을 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어느새 슬픔은 더욱 깊은 심연으로 내던져져서 문득 문득 더이상 울지도 못하는 어떤 괴로움으로 찾아오는 것은 아닐지. 음악이 건져올려준 오랜만의 슬픔을 느낄 수 있어서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했다.






라벨 콘체르토 2악장 음원

Ravel: Piano Concerto in G Major, M. 83: II. Adagio assai

여행 전 봤던 15살 시절 임윤찬의 영상

https://youtu.be/HU2ts-s92ZU?si=rcB8J0VvDGe4-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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