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가 어떤 느낌인지는 사실 유투브로 보고 알고는 있었다. 역 근처의 빵빵거리는 차들과 오토바이, 지저분해보이는 길 등등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과 달랐다. 그래서 가고싶지 않기도 했지만, 나를 이탈리아로 데려간 결정타였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의 배경이 나폴리였다. 소설 속 나폴리가 살기 좋은 곳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주인공이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온 애증의 고향이다. 나폴리 피자와 맛있다는 빵이 궁금하기도 해서 결국 로마 다음 행선지를 나폴리로 정했다.
나폴리에 처음 도착했을 땐 '생각보다 깔끔한데?' 하며 걸었다. 나폴리 첸트랄레 역에서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바로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서 짐만 내려둔 뒤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 지역에서 유명하다는 pasta e patate (감자 파스타)를 먹어봤다. 꽤 오랜만의.. 입맛에 맞는 파스타였다. 흔히 먹던 로제 파스타를 감자버전으로 만든 것이긴 했지만,, 오랜만에 싹싹 긁어먹었다.
식당에서 나와서 바로 소설을 읽으며 가보고싶었던 '플레비시토 광장'을 가려고 구글맵을 켜고 걷기 시작했다. 너저분한 좁은 골목을 지나 넓은 길로 가니 사람이...정말 미친듯이 많았다. '비아 톨레도'라는 거리를 걸었는데, 알고보니 거의 명동 같은 곳이었다. 스트릿 푸드를 파는 핫한 가게 앞에는 최소 10명씩 줄서있었고, 거리 사이로 보이는 좁은 골목들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들이 내 눈엔 예뻐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혼란스럽고 기빨렸다. 왜 하필 또 토요일에 도착한걸까.
도착한 플레비시토 광장 주변엔 경찰도 많고 앞에 커다란 임시 무대 셋팅 같은걸 하고 있었다. 경찰관들이 멋있었긴한데.. 가까이 가야만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플레비시토 광장은 황량하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건물 자체로는 웅장하고 멋졌지만 오래있고 싶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주변에 있는 로열 팰리스, 카스텔 누오보 등을 둘러보며 나폴리가 프랑스, 스페인 영토였던 역사들을 둘러보고 해질 무렵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 날 잠에 들기가 어려웠다. 나폴리를 한바퀴 둘러본 뒤 내 심경은,, 얼른 벗어나고싶다는 마음이 컸다. 나는 대단한 명소가 있지 않아도 걸어다니는 길이 예쁜 여행지가 좋다. 나폴리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거리는 더럽고 무질서해보였고, 차들이 내는 경적 소리와 앰뷸런스 소리가 숙소 내 방안까지 끊임없이 들려왔다. 심지어 자정이 넘었는데도 퇴근 피크 시간에 들을 법한 경적 소리가 일관되게 이어졌다. 성깔 미쳤네.. 싶었다. 생각해보니 기차에서도 나폴리 역 도착해갈 무렵 한국인보다 더 빠르게 짐을 챙겨서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차도 쌩쌩 빠르게 달려서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내가 또 하나의 앰뷸런스 소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무서웠다. 그런데 벨기에 가는 비행기 때문에 이미 3일이란 시간이 여기에 고정되어있었다. 하는 수 없지. 피할 수 있는만큼 피하고, 피할 수 없을 땐 즐기자... 감사하게도 가방에서 귀마개를 찾아서 꽂고 잠들 수 있었다.
열심히 검색해서 둘째날은 아예 폼페이와 소렌토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둘 다 큰 기대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기만을 바랬다. 엄청 인상적인 곳들은 아녔지만 평화로운 거리를 걷고 구경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저녁에 소렌토에서 나폴리로 돌아오는 사철 기차를 탈 때는 자리도 하나도 없고 인터넷도 터지지 않았다. 다시 그 혼란의 나폴리로 가는데다 30분 가량 서있느라 몸도 마음도 피곤했다. 다운로드 받아둔 오마이걸의 '일기예보'를 들었다. 위로가 되는 가사가 나온다. '내일 날씨는 분명히 / 어저께보다 더 / 오늘보다도 반드시 / 눈부실 거야'
그 다음날부터 정말로 마음의 날씨가 좀 개었다. 아침에 고고학 박물관으로 향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한 정거장 전인 단테역에 내려서 가까운 카페를 찾았다. 카페가 위치한 골목에 들어서자 중고서점들과 야외 가판대, 위쪽에는 예쁜 등들이 장식되어있었다. 카페를 갔더니 직원들도 친절했다. 이런 곳도 있네. 예쁘다... 하며 따뜻한 음료를 마시며 마음이 녹았다.
오후에는 카우치서핑으로 연락했던 L과 만나서 나폴리를 걸어다녔다. L은 방에 틀어박혀서 예술하는 사람 같은 이미지였다. 담배도 거리도 안두고 피우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계도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일단 내가 피자 프리타(튀긴 피자)를 먹어보고싶다고 해서 '소르빌로' 라는 가장 유명한 가게에 함께 갔다. 1인 1피자를 주문하고 눈앞에서 피자를 튀기는 광경을 지켜봤다. 맛있긴 한데 딱 내 예상 만큼의 맛. 그렇게 꼭 먹어봐야하는 피자는 아닌 것 같았다. 피자를 먹으며 내가 가본 곳들을 이야기하니 L은 더 예쁜 곳들이 많은데..하며 푸니쿨라를 타고 성 근처까지 올라가서 일몰을 보자고 했다.
이야기하며 거리를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너른 바닷가였다. 항구가 있으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바다가 있는건데. 탁트인 바다를 보니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성도 보이고 다른 마을들도 보였다. 사람들도 별로 없고 차도 별로 없어서 파도소리만 들려왔다. 방파제가 쌓여있는 길 주변으로 걸으며 간만에 행복했다. 여기도 나폴리구나. 비아톨레도의 첫인상이 너무 강해서 이런 풍경을 만날줄은 전혀 몰랐다.
L은 중간중간 샛길로 잘 빠졌다. 길가다가 옷을 보고싶으면 옷 구경을 하러 들어가고, 달달한게 땡기면 카페에 들어가서 초코쉐이크를 사서 테이블에 놓고 서서 먹었다. 덕분에 나도 귀여운 수면양말을 사고, 디저트가 유독 맛나보이는 나폴리의 여러 디저트 빵들을 맛봤다. 그러는 사이 일몰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 어둑어둑해졌다. 흠.. 근데 일몰 보자면서요...?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는 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내가 호스트였다면 계속 시계를 보면서 푸니쿨라까지 빠른 걸음으로 후딱후딱 지나가며 시간을 맞췄을텐데.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놀러와서 왜 계속 시계를 봐야하나 싶기도 했다. 너무 목적지향적인가. 그는 나랑 대척점에 있는 사람 같았다.
푸니쿨라 정거장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사이, L은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더니 역무원에게 질문을 했다. 여기서 푸니쿨라를 타면 원래 가려던 성 쪽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어쩐지 바닷가를 너무 오래걷는다 싶었다. 푸니쿨라를 타고 윗 동네로 올라가서 성 쪽으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또 다른 세계였다. 길 자체는 조금 휑했지만 숙소 주변과 다르게 조용했고, 야경이 펼쳐졌다. 특별한 건물이 보이진 않지만 잔잔하게 예뻤다.
L과 성 근처까지 가서 좀더 파노라마로 펼쳐진 야경을 구경하고, 다시 중심가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부터는 다시 첫째날 봤던 지저분한 길이 이어졌지만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맛보고나니 첫날 일부분 본걸로 함부로 단정지을 순 없겠다고 생각했다. 나폴리에만 있는 스포리아텔라같은 디저트, 파스타, 피자의 맛들도 다른 지역 음식에 비하면 훌륭했다. 그렇긴 하지만 첫인상이란 건 지울 수 없는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나폴리는 전체적으로 혼란스럽지만 마냥 나쁘지만도 않은 알록달록한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