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중세 동화 속 같은 마을 :벨기에 브뤼헤, 겐트

by 구은서

한국에서 계획한 여행 일정은 이탈리아까지가 끝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벨기에에 갈때까지만 해도 끊지 않았다. 어디를 더 가봐야 아쉽지 않을까? 4주정도 여행을 하고 나니 예쁜 풍경은 충분히 보고 즐겼다 싶었다. 좀더 현실로 돌아가서, 살아볼만한 나라들을 가보는 건 어떨까? 어느 나라든 결국 영어로 일하는 회사에 다녀야할거다. 그라나다에서 만났던 독일 언니가 영국 말고도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도 영어 쓰는 회사들이 제법 있다고 말해주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 세 나라를 둘러보기로 했다.



나폴리에서 로마 공항까지 버스를 타고, 로마-브뤼셀 저가항공으로 이동했다. 나폴리에 있다가 브뤼셀로 가니까 기온이 10도이상 떨어졌고 비가 내려서 우중충했다. 플랫폼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브뤼셀에서는 슈퍼나 빵집에 가면 누가봐도 외국인인 나에게까지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봉쥬흐-! 만 하고 영어로 주문하면 영어로 대답해주긴 했다. 일주일 넘게 이탈리아어를 듣다가 프랑스어를 들으니 상대적으로 엄청 우아하게 들렸다. 이래서 다들 프랑스어를 배우나? 그런데 프랑스어를 잘 해야 살아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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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부터 브뤼헤와 겐트로 당일치기를 떠났다. 브뤼헤는 ‘벨기에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있다. 정말로 곳곳에 작은 운하가 있고, 작은 보트를 타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걷다 보면 계속 운하를 만나게 된다.


비가 오기 시작해서 근처의 성당으로 들어갔다. 여행하는 동안 나는 성당이 보이면 꼭 한 번씩 들어갔다. 이 날은 성당에 들어가자마자 성가대 합창하는 노랫소리가 배경음악으로 들려서 저절로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우리 가족을 위해, 친한 언니를 위해 기도했다. 곧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할지, 나는 왜 틈틈이 우울해지는건지, 하는 답 없는 질문들도 했다.


성당을 나오니 비가 그치고 선물처럼 푸른 하늘이 보였다. 걸을수록 구름이 더 걷혀 약간 회색빛이던 도시가 색을 되찾았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보이는 풍경은 더 동화 같았다. 건물 하나하나도 레고로 지은 집처럼 정갈하고 귀엽게 줄지어 서 있다. 그러다 가끔 중세 느낌이 나는 첨탑이 보이기도 하고. 특별한 뭔가 없이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 즐거웠다. ‘동화 속 세상이 여기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광장 주변의 크리스마스 장식 가게, 초콜릿 가게, 와플 가게까지도 다 예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기차 안에서만 해도 무표정으로 별 생각 없었는데.


문득 생각했다.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두운 마음을 어떤 빛으로 걷어낼 수 있을까. 마음껏 쉬기도 어렵고, 아름다운 풍경이 나를 압도하지도 못할 때, 나는 또 다시 어두운 채로 계속 버티기만 할까?


음. 알 수 없지만 미래의 나도 무언가를 하며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까?

과거의 나는 더 깊은 심연으로 갈 뻔한 나를 이끌고 너무나 큰 숙제 같았던 퇴사도 이사도 잘 해내고 여행도 무사히 시작했으니. 아직까지도 정해진 것도 없고, 힌트도 생각보다 많이 얻지 못했지만. 여행은 무기력했던 나를 서있게 하고 여기저기서 살아남게 만들고, 적응하게 만든다. 계획했던 여정을 4주동안 어떻게든 실현해낸 나를 보면서 충분히 자신감을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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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헤를 살짝 아쉽게 둘러보고 나와서 겐트로 향했다.


겐트는 브뤼헤보다 묵직한 분위기였다. 채도가 낮은 동화 속 마을 같기도 하고, 중세 판타지 같은 느낌도 있다. 누군가는 해리포터 감성이라 했던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에든버러를 닮은 중세의 성과 성당들. 성 바보 성당(ㅋㅋ Saint Bavo's Cathedral)은 높이가 압도적이어서 처음엔 놀랐지만, 성당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감흥은 금세 줄어들었다. 내부보다 외관이 훨씬 훌륭했다.


겐트 성도 내부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둘러보고 싶어서 성문 앞까지 도착했다. 그라나다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악기 연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트럼펫, 작은 북 소리.. 그리고 각양각색의 분장을 한 무리들이 끊임없이 성 안에서부터 밖으로 행진을 했다.


코스프레라고 하기엔 어설프고, 그렇다고 그냥 퍼포먼스라고 하기엔 뭔가 역사적인 무언가의 냄새가 났다. 가문 문장 같은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한참동안 여러 컨셉의 분장을 한 사람들이 지나갔다. 흥미로운데 도대체 이게 뭐지? 너무 궁금했다. 그 모습을 계속 사진찍고 지켜보는 학생 같은 사람이 있어서 물어봤다. 오동통하고 맥주 한 잔쯤 마시고 얼큰해진 듯한 얼굴로 친절하게 알려줬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서 충분히 듣진 못하고 이름을 알아두고 찾아봤다. 1940년대에 학생들이 장난처럼 성을 점령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건 그 날을 기념해서 매년 열리는 축제(gravensteenfeesten)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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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너무 와서 카페를 들렀다 나왔지만 계속 내렸고, 바람 때문에 우산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결국 포기하고 그냥 걸었다. 비 맞는건 괜찮은데 추웠다. 사람들이 모자를 쓰고 두꺼운 머플러를 두르고 장갑을 끼고 있는게 부러웠다. 그 와중에 성당 주변의 야경이 정말 예뻐서 추운데도 떠나는 발걸음이 아쉬웠다.


만약 유럽에 대한 환상이 가장 강했던 10년 전에 벨기에를 왔더라면, 정말 정신 못 차리고 사랑에 빠져 눌러앉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유명한 곳을 가기 바빴다. 사실 난 작은 소도시나 마을이 취향이다. 여행지로 유명한 곳들은 대부분 대도시여서, 지금까지 그런 곳들을 많이 가보진 못한 것 같다. 여행도, 삶에서도 때때로 막연하게 좋아보이는 것들을 선택했다가 많은 고생을 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반복하며, 나중에는 우연에 기대지 않고도 취향에 맞는 곳들을 자주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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