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은 다른 여행지에 비해 생소했고, 주변에 네덜란드에 다녀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이 도시에 사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싶었다. 플랫폼에서 메시지 보낸 사람들 중에 아랍인인데 핀테크 분야에서 일한다는 압둘라 라는 애가 있었다. 좋은 레퍼런스도 많고 일하는 이야기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약속을 잡게 되었다.
암스테르담 역에 내려서 숙소까지 가는 동안 계속 작은 운하를 지나갔다. 운하만 보면 귀엽고 조그만 마을 같은 느낌이지만 사람들이 많은 큰 광장에서 운하까지 아주 가깝다. 트램에서 내리고 나니 자전거가 어찌나 많이 지나가는지, 한강 공원에서처럼 많은데 도시 한가운데라 생경했다. 마약과 홍등가 때문인지 좀더 자유분방하고 더러운 느낌을 예상했는데, 거리는 단정했다. 홍등가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마약 냄새는...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 딱 한번 맡아봤다.
추워서 더 껴입을 옷 쇼핑을 하고 지쳤을 무렵 압둘라와 카페에서 만났다. 석유왕자가 연상되는 이름이지만 그는 단정한 겨울 코트와 머플러를 하고 유창한 영어로 인사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사는 거 완전 만족한다고, 다국적 문화이고 그의 회사는 네덜란드 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고 했다. 삶의 질도 높다고. 여기서 더 높아지려면 코펜하겐을 가고, 낮추려면 베를린을 가면 된다고 했다. 흠, 나 다음 행선지 베를린인데. 하니까 거기 완전 못생겼다며, 안됐네 하고 웃었다.
깜깜해진 길을 걸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밤의 운하 길도 예뻤는데, 이야기 듣느라 사실 풍경은 기억이 잘 안난다. 어떤 사실을 얘기하면서 곧잘 예화나 스토리를 들려주는, 맛깔나게 이야기하는 친구였다. 왜 나같은 한국인을 만나고 싶었을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국의 역사가 흥미롭고, 최근 몇년 사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떡상한 이유도 궁금하다고 했다. 한국인 친구들도 몇 있다며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줬는데, 완전 순진한 남자애를 만났던 것 같다. 사진을 부탁하면서 폰을 양손으로 공손하게 주고받았다고 했다. 한국인 다 그렇지 않아...하며 정정해줬다.
저녁 메뉴를 이야기할 때 그는 '네덜란드 음식' 같은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고향인 시리아의 음식 샤와르마를 먹었는데, 찐 맛집이라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줄서있었다. 시끄럽고 생소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애의 반응으로는 중동의 80년대 트로트같은 걸 틀어놓은 듯 했다. 그걸 빼면 너무 훌륭했다. 샤와르마는 케밥처럼 생겼는데 심한 향신료 냄새나 잡내 없이 맛있는 고기가 들어있고 감싼 빵은 바삭했다. 오랜만에 만난 맛있는 음식.
쭉 이야기하다보니 압둘라는 호기심 많고 지적이었고 자신감이 넘쳐 흘러보였다. 그냥 봤을 땐 수염때문에 몇 살인지 짐작도 안되지만 아직 20대라 그런지 웃으면 장난꾸러기같은 느낌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10살은 어려보인다면서 진짜로 동생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20대로 돌아가보지 뭐, 싶었다.
다음날엔 아침엔 함께 '잔세스칸스' 라는 풍차마을로 갔다. 처음엔 이름도 위치도 모른채 따라나섰다. 동화속에 나올 것 같은 옛날 식 풍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사람들이라곤 패키지 관광객들밖에 없었다. 뷰포인트마다 셀카찍기에 열성인 중국인들을 보며 그가 '굳이 저렇게 해야하나.. 뭘 위해서 저래?' 하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이쁘다. 이쁜데 왔다. 하고 남겨놓고 자랑하고싶을 수 있잖아." 라고 대답하긴했는데 왠지 나 이상하게 보려나 싶어 사진 부탁은 하지 못했다. 어차피 난 한 두장 정도 기념으로만 남기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는 사진을 거의 안찍는다고 했다. "기억하면 되지. 그냥 즐겨." 내가 "기억이 안나는데 어떡하냐" 라고 하니까 뇌는 가소성이 있어서 트레이닝하면 기억력이 좋아진다고 했다. ㅋㅋㅋ 그러다가 커다란 전통 구두 포토존 앞에선 이런 재밌는걸 기념으로 남기라면서 몇 장 찍어줬다.
풍차마을에서 레고마을까지 둘러보고,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페리를 타고 시내를 걸어다녔다. 페리에 자전거 끌고 오는 사람들이 절반이었다. 날씨가 추운데도. 횡단보도 건널 때 차만 확인하고 자전거는 제대로 확인 안해서 압둘라가 치일 뻔 하는 나를 몇번이고 붙잡았다. 중심가에서부터 전통있는 쿠키맛집, 로컬시장, 국립미술관 등을 걷다보니 이날은 3만보를 걸었다. 그가 하는 질문이 되게 신선했고(어린시절,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는지, 등등) 들려주는 이야기도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걷고 구경했다.
저녁을 먹고 걷다가 암스테르담역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버스가 안오고 거의 30분을 기다려야했다. 추워서 그냥 앉아있기도 어려웠다. 그 상황에서 그가 갑자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데려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친구 집이 여기서 금방이라며. 그래서 그의 친구네 집 앞에 가서 함께 차를 얻어탔다. 친구도 아이아빠라 집에 오래있다가 바람 쐐면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데 나라면 절대 생각못했을 방식이라 신기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마지막날은 원래 혼자 보내려고 했다. 압둘라는 뭐랄까.. 자수성가한 비즈니스맨이라 바쁠 것만 같고 주말을 다 나랑 보내진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에 연락이 와서 내 계획을 묻더니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
그의 차를 타고 근교도시 레이든으로 갔다. 춥고 바람불고 비오는 날씨였다. 내가 한국에 있는 롱패딩이 그립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걸 잊지 않고 그가 두꺼운 패딩이랑 머플러를 챙겨와서 빌려줬다. 혼자 갔다면 아마 그 날씨에 모자도 없는 숏패딩을 입고 오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생고생을 했을 여정이었다. 레이든의 아늑한 카페에서 핫초코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마지막 저녁은 네팔 식당을 갔다. 밥을 먹다가 문득 주위를 보니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식사를 하고있다. 나도 앞에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가 있고 맛있는 음식이 풍성하게 깔려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아늑하고 취할것만 같았다. 동시에 이것조차 나중엔 기억에서 사라질 것 같아 슬펐다. 내가 느낀 그대로 얘기를 했다. 내가 아름답다고 감각했던 것조차 너무 빨리 잊혀지는게 슬퍼. 감각을 하는 센서들조차 너무 많이 죽은거같아. 라고.
너에게 그게 그만큼까지 중요하지 않은가보지. 라고 단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중요해. 난 분명 엄청 아름답고 잊고싶지않다고 생각도 했거든. 그런데 일기를 쓸 때도 풍경에 대해선 많이 쓰지 못하고 너랑 나눈 이야기 같은 걸 더 쓰고 있어.
그렇담 어쩌면 그게 너가 찾는거인거 아니야? 여행하면서 온갖 예쁜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보다, 너에게는 이야기가 더 필요했던거지. 다른건 그거보다 덜 중요해서 금방 잊고 말이야.
너 이야기 들어보니까 한국에서 삶이 쉽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너는 그냥 이쁜걸 보러 온 게 아니고 완전히 다른 환경을 보고 옮겨다니고 경험들을 하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리프레시가 필요했을거같아. 그거 자체로 이 여행이 되게 잘 되고 있는 거 같은걸. 아까 그 때에 비해 회복됐다고 말했고. 지금 완전 잘 웃어.
그가 하는 말이 구구절절 다 맞았다. 심지어 여행준비를 하며 여행에서 뭘 원하는지 글로도 써놨었다.. 근데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꽤나 잊어버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위안감, 걱정할거 하나도 없고 자연스럽다는 말로 얻는 안도감. 같은것들이 밀려와서 눈물이 살짝 날뻔했다. 나흘만에 이런 나를 캐치해서 다정하게 이야기해준 그도 참 놀라웠고 감사했다. 너무나 예뻤던 운하의 풍경도, 하늘의 색감도 다 흐릿해져도 괜찮다. 그보다는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 웃었던 시간, 감탄하고 즐거워했던 감정 자체를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