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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하나가 데려간, 아름다운 마을 : 이탈리아 메란

by 구은서


메란(Meran), 메라노 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곳은 원래 내 목적지는 아니었다. 볼차노 컨퍼런스 신청 후에 Couchsurfing이라는 플랫폼에 볼차노에 갈 예정이라고 짤막한 글을 올렸는데, 그걸 보고 H 라는 사람에게 메시지가 왔다. 정중함과 예의가 풀셋팅된, 장문의 이메일 같은 메시지였다. 볼차노 근처에 메란이라는 마을이 있고 거기 살고있는데, 아름답고 특별한 곳이고 네가 오면 곳곳을 소개해주겠다- 라는 내용. 찾아보니 진짜 예뻐서 여행 일정에 끼워넣게 되었다. H랑은 그날부터 매일매일 짤막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사실 그가 '굿모닝. 좋은 하루 되길 바래.' 같은 인사와 등산 후 찍은 풍경사진을 보내는게 대부분이라 왠지 모르게 너드같은 이미지로 그를 상상했다.


실제로 마주한 그는 180센티미터쯤 되는 장신에 깊은 눈, 높은 코, 무성한 수염을 가진,, 도저히 너드는 아닐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태도와 말씨는 메시지할 때처럼 젠틀하고 따듯했다.


메란에 도착한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온종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오전 산책을 하며 중심가를 둘러보는 걸로 시작했다. 저 멀리에는 눈쌓인 설산도 보이고 사방이 온통 산이었다. 좀 추워서 단단히 입고 나오긴 했지만 11월 초에 벌써 설산이라니. H가 몇몇 개를 가리키며 저 산은 3천몇백미터, 저건 2천몇백미터... 하고 알려주었다. 걷다보니 조그만 천이 흐르고 있었고 근처에 교회들과 중심가의 상점들이 나왔다. 걸어서 어디든 다 갈만한 조그만 마을이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의 도시들과 다르게 낙서 하나, 쓰레기 하나 안보이는 깔끔함과 평화로운 분위기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중에 H가 길가의 쓰레기를 주워서 한참 들고 있다가 분리수거하는 모습을 보고 왜 그런지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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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을 따라 걸으면서 H가 설명해준 바로는, 이곳은 남부 티롤지방이고 원래는 오스트리아 땅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땅이 되면서 이 지역 언어(티롤리안 이라는 독일어 방언)를 지켜주기로 협정했다고. 그래서 그의 모국어는 티롤리안이고 이곳 사람들 대부분 독일어랑 이탈리아어를 둘다 쓴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Meran이라는 원래 이름과 이탈리아정부가 붙인 'Merano'라는 이름을 둘다 표기하고 있다고.


마을이 어찌나 작은지 걸어가면서 그의 어머니와도 마주치고, 그의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가시는 것도 보고, 친구 가족도 만났다. 다들 '구텐 모르겐' 하고 독일어로 인사하고 가볍게 스몰톡을 했다. H는 걸어다니면서 설명을 계속 해줬는데 지역의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슬퍼했다. '원래는 이거였는데 지금은 없어져버렸어', '여긴 이제 너무 관광객용 스트릿이 돼버렸고 비수기에는 제대로 운영하지도 않아' 하며.


천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고 천 옆에 난 길을 따라 중심가를 벗어나 옛날에 성의 일부였던 게이트, 로마시대의 다리, 성당 등등을 구경했다. 성당 안에 잠시 들어갔을 때 H는 바로 성수를 찍고 성호를 긋고 예수님 상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랄까 갑옷만 입으면 중세시대 기사가 될 것 같았다. 난 카톨릭이 아니라서 그냥 막 들어갔는데.. 원래 저렇게 하는거구나 싶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가벼운 하이킹을 하러갔다. 내가 무릎이 곧잘 아프다고 해서 나에게 맞춰 난이도가 하향된 코스였다. 산 중턱에 있는 성 두개를 찍고 내려오는거였는데 산꼭대기에 비하면 한참 낮아서 안심하고 출발했다.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는 채로 열심히 따라 걸었다.


걷다가 갑자기 "오 결혼식을 하나보다"라고 말하길래 어떻게 알았냐고 하니 멀리서 차 경적소리들이 들린다고 했다. (난 안들렸다) 몇 분 지나니 그 차들이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 엄청나게 빵빵 거리면서 지나갔다. 결혼식 날 신부와 신랑 차, 그리고 그 친구들의 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가는게 문화라고 했다.


이 외에도 40, 50, 60살 등등 특별한 생일날 아침에 친구들이 몰려가서 시끄럽게 깨우는 전통 같은 것도 얘기해줬다. 그거 하려고 최근에 새벽 다섯시에 깼다고.... 정말 대도시에선 절대 못할 것 같은 낭만이다.


첫번째 성까지 올라가고 나서는 쭉 높은 지대에서 평지 길을 걸었다. 길 옆으로 보이는 마을의 집들이 이제 다 쪼끄만해지고,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마을 일부를 덮고 있었다. 어디선가 염소와 닭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저 먼곳을 봐도 다 높은 산이었다. 시시각각 걸어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대자연의 모습에 감동감동하며 걸었다. 내가 사는 대구도 사방에 산이 보이는 곳이지만 여긴 스케일이 남달랐다. 사진, 영상으로 담아봤자 절반도 담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글로도 표현이 안된다. 왜 여기에 이틀 밤만 자도록 계획한걸까? 눌러 앉아 살고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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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별별 이야기를 다 했다. 여행 오기 전의 나, 내가 하고싶은 일, 그가 하는 일, 연애와 결혼에 대한 가치관 등등. 한국에서는 사귈 때 둘 중 한명이 고백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시작한다고 하니까 충격받는 모습이 재밌었다. 완전 용기가 대단해야 할 것 같다며. 이탈리아에서는 고백없이 전개되는 대로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다고 했다. 데이트를 그냥 맘에 드는 사람 카페나 어디선가 발견하면 말걸고 이야기해보고... 하는 걸로도 많이 시작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선 그게 더 용기있는 자들이 하는 건데...


내려올 즈음엔 해가 지고 있었다. H는 슈퍼가 7시쯤 문을 닫아서 그 전에 가야한다고 말했다. 대도시는 그래도 9시 언저리였는데 7시라니..! 불편하지 않아? 라고 물어봤다. "전혀. 왜 항상 열려있어야 하지? 그들도 밤에는 쉬어야지. 내가 잘 계획해서 미리 사놓으면 괜찮아." 라고 했다.


유럽의 상점들이 일찍 닫는건 워낙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확 다가왔던건 아무래도 내가 가끔 회사 이슈를 대응하며 새벽에도 일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척점의 세상이다. 사회구조와 문화, 가치의 우선순위. 한국의 24시간 편의점은 여기선 가치가 바닥까지 추락한다. 우리는 극강의 편리함을 추구하며 분명 잃어버린 것들이 많다. 그런걸 생각하니 흥미롭고 더 공부해보고싶기도 했다. 나는 무엇을 우선시하며 어떤 가치에 기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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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는 다음날 볼차노 역까지 차로 데려다줬다. 고속도로를 타면 금방인데, 뷰가 좋다며 한시간 거리의 구불구불한 산길 도로를 선택했다. 하이킹코스만큼 어마어마한 뷰였다. 다만 갈수록 시간이 빠듯한게 느껴졌는데 '정 안되면 수수료 내고라도 기차 취소하지 뭐.' 라고 생각할 정도의 뷰였다. H가 오히려 초조해하는게 느껴졌다. 커브구간이 곧 다가오는데도 재빠르게 역주행해서 앞 차를 제쳤다. 딱 기차 출발 10분 전에 역에 도착했다. 너무너무 고마웠다. 메란을 알게 해주고 대접해준 것 부터 나눴던 진솔한 이야기들까지 다. 이후에도 유럽에 있는 내내 그는 내가 잘못될세라(?) 안부를 묻고 고민도 들어주었다. 지금도 종종 연락하는 친구. 멋진 풍경도 좋지만 멋진 친구와 함께여서 더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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