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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Nov 08. 2021

사서가 읽은 책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

 여기저기서 허지웅이 변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인터넷에서도 주위에서도.

 원래 관심 있는 작가는 아니었기에 그 말을 듣고도 그런가 보다 하다 우연히 보게 된 라디오스타에 나온 그의 모습에 나도 그 의견에 동조하게 되었다. 사람이 훨씬 유해지고 편안해졌다는.

 암투병 뒤에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바닥을 찍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무한도전을 보며 고통을 잊어 무한도전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의 말이 남일 같지 않아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그와의 심리적 거리감이 갑자기 줄어들어 버렸다.

 


 물론 내가 그의 고통과 아픔을 100프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저마다 고통의 민감도가 다르고 심리적 예민도도 다르며 처한 상황도 다르니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더군다나 나는 사형선고와 같은 '암'을 겪어내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가 밤을 보내며 느꼈던 외로움과 고독과 고통을 나 역시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끝난 것 같고 땅끝으로 빨려가 그대로 잠식해버렸으면 하던 밤들이 이해가 돼서 생판 모르는 남이지만 그 밤을 이겨내라고 응원하고 싶었다.  그 밤을 보낸 사람은 안다. 서로 알아볼 수가 있다.



 허지웅이 '살고 싶다는 농담'을 왜 쓰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 밤을 보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글쟁이인 그가 글로서 함께해주고 싶었던 것 아닌지 감히 추측해본다. 책을 읽던 나도 그와 함께 견뎌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읽는 내내 역시 허지웅은 뛰어난 작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 고통의 시간을 경험한 다수의 사람이 있지만 그만큼 감정과 상황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내가 느꼈던 희미하고 알 수 없으며 한데 뭉쳐져 정리가 되지 않던 내 생각과 감정들을 정확한 표현으로 혹은 정확한 인용구로 정리해주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내가 지나온 그 시간이 나에게 어떤 느낌이었고 상황이었으며 어떻게 내가 빠져나왔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김영하 작가가 작가는 단어를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상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아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내가 읽은 '살고 싶다는 농담'은 작가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책이었다.  오랜시간 해왔던 고민을 명석한 작가가 철학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풀어낸다. 그 고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이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한다. 무엇보다 읽기가 쉽고 편한 문장으로 쓰여진 글이라 더 매력적이다.



 덧붙여 그 어두운 시간에 잠식되지 않고 이겨낸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어두운 시간은 끝난 것이 아니다. 계속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사라지지 않는 어둠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우리 서로를 응원해주고 싶다. 그리고 거기에 함몰하지 않고 같은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과 청년들을 위해 같이 버티자고 손 내밀고 응원해주는 그에게 고맙다. 그리고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살기로 결정했다는 그를 응원하고 싶다. 나도 그 밤 살기로 결정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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