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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현 Jan 19. 2022

긴 여행의 마지막 도시, 톨레도


 세테닐과 론다, 쿠엥가를 들렀다 마지막 여행지인 톨레도에 도착했다. 톨레도는 화가인 엘 그레코가 살았던 도시이기도 하며 옛 스페인의 수도였다. 마드리드에서도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야 하는 나에게는 마지막 여행지로 제격이었다.


 안달루시아 여행 내내 비가 와서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톨레도에 도착하니 맑은 하늘이 반겨준다. 길가에 피어있는 벚꽃을 보니 봄이 실감이 난다. 스페인에도 벚꽃이 핀다던 선생님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님을 톨레도에 와서야 알았다. 스페인 벚꽃은 한국 벚꽃보다 조금 더 색이 짙고 선명했지만 아름다운 것은 마찬가지다. 스페인 벚꽃 이야기에 서로 우리나라 벚꽃만 못할 거라고 일본 친구들과 자존심 싸움을 하던 광경이 떠올라 웃음이 나온다. 어느 나라 건 벚꽃은 다 예쁘다.

톨레도에 핀 벚꽃나무


 도시는 과거의 스페인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했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에 웅장한 성당까지 어우러져 도시 전체가 조용한 수도원 같다. 엘 그레코 미술관과 그의 작품이 걸려있는 대성당을 둘러보았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성당은 화려하고 엘 그레코의 작품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했지만 오랜 여행에 지쳐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대성당을 나와 근처에 조용한 카페를 찾아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이제 모르는 곳에 들어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음식을 주문할 만큼 이곳에 익숙해졌다. 조용히 앉아 핸드폰 속 지난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요를 깨는 소리가 들려온다. 투어를 온 관광객들이 카페 근처로 몰려왔다. 다른 도시에 비해 톨레도는 한국인 투어 관광객이 유독 많았다. 마드리드에서 가까운 데다 볼거리도 많아 마드리드에서 머무르며 당일치기로 오는 여행지로 제격인 도시였던 탓이다. 대성당과 미술관을 오전 일찍 구경하고 온 것이 다행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톨레도 가는 곳마다 투어 하는 사람들로 모든 관광지가 인산인해였다. 관광객의 대부분은 등산복 차림의 중년 어른들이었다. 간혹 가족끼리 온 사람들도 보였다. 모두가 설레는 얼굴로 톨레도 여기저기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이 멋진 관광지에서 심드렁하게 앉아있는 나와 대비되어 보였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곳을 어느 한 군데 놓치지 않고 보고 싶은 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만 일어나 다시 스페인의 마지막 명소를 눈에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 그레코 뮤지엄
뮤지엄 내부_실제 엘 그레코가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엘 그레코의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그림을 보기 위해 산토 토메(Sanro Tone) 성당으로 향했다. 대성당에 비해 유명한 성당이 아닌데도 입장권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대열에 합류해서 기다렸다 들어간 성당 오른쪽 벽면에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그림이 걸려있었다. 진품은 아니라지만 명화를 직접 보기 위해 줄을 서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마음이 달라져서 일까 오전에 본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직접 본 그림은 압도될 만큼 멋있었고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이 생생하게 보였다. 한참을 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함께 들어왔던 관광객들은 모두 떠나간 후에도 서서 그림 속 인물들을 하나씩 들여다봤다. 그림을 그릴 때 엘 그레코의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아 인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성당은 아주 작았고 구경할만한 것도 그 그림 하나밖에 없었지만 입장료가 아깝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림 앞에 서서 감상을 하고 밖으로 나와 멀리 산이 보이는 전망대에 앉아 스페인 맥주인 스텔라를 마시며 톨레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역시 옆자리에는 투어를 온 한국인 관광객들이 스페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까 만났던 관광객들은 아니었지만 고마웠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직도 그 카페에 앉아 있느라 멋진 그림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스페인에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실적인 문제들로 고민하느라 혹은 실천력이 부족해서 망설이기만 했다면 이런 멋진 명화를 볼 수 없었을 것이고 8개월간의 아름다운 경험들을 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삶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때 망설임 없이 떠나기를 실행해준 나에게 고마웠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귀찮음에 혹은 안일함에 새로운 도전에 망설여질 때면 그 카페에 있던 나를 떠올린다. 가만히 카페에서의 여유만 즐겼더라면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명화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톨레도 골목길

 투어 일행 중 가족 하나가 옆에 있던 내게 사진을 부탁했다. 전망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가능하면 최대로 잘 나올 수 있도록 열심히 사진을 찍어줬다. 오늘 톨레도에서의 기억이 이 가족의 역사에도 자양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나도 스페인에 다시 오게 되면 설레는 눈으로 인증사진을 남기는 관광객이 될 것이다. 스페인이 살던 곳에서 관광지로 바뀌는 날이 오게 된 것이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 기억을 자양분 삼아 한국에 가서 다시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와서도 지금까지 이때의 기억을 가끔씩 꺼내보며 오늘까지도 나는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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