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ision Height

고백할 타이밍을 놓치지 마세요.

by 반은섭
싱가포르에 살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봅니다.


저는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참 좋아합니다. 이곳은 비가 자주 와서 좋습니다. 적도에 위치해 있다 보니, 가끔씩 스콜이 지나기도 합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비가 시원하게 내려줍니다. 가끔씩 온 세상을 잡아먹을 것 같은 천둥이 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큰 천둥소리를 이전에는 듣지 못했습니다. 대자연이 참 신기할 따름입니다.

한 가지 더 있군요. 이곳에서는 시간의 여유가 많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을 빼고는 4시 10분 이후에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한국의 고등학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죠.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사색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삶의 여백입니다. 여백에서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고 결국 그 누군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는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해가 질 무렵의 고즈넉한 학교 풍경이 제법 운치 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 몇 개를 아이폰에 걸어놓고 언덕을 내려갑니다. 나무 냄새가 상큼합니다. 시원한 바람이 친구가 되어 줍니다. 촉촉하게 젖은 땀이 바로 마릅니다. 적도의 저녁 풍경입니다.




언덕을 거의 내려올 때쯤, 또 다른 밤의 세상이 열립니다. 가로등이 켜집니다. 양쪽으로 길게 도열된 가로등 사이를 지날 때, 문득 20여 년 전의 군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 무렵, 저는 어느 공군 기지의 관제탑에서 2년 넘게 살았습니다. 관제탑은 365일 24시간 누군가가 근무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밤에도 항공기가 뜨고 내리거든요. 야간 비행입니다. 일몰시간을 항상 체크해야 합니다. 일몰시간에 맞춰 활주로 등을 켜야 합니다. 야간 비행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활주로 등입니다.


야간비행


활주로 등은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항공기 착륙을 유도해주는 Approach Light, 이착륙 활주로의 Main Light, 그리고 기타 지상의 항공기들이 움직이는 곳에 있는 Taxi way Light입니다. 세 가지 Light의 색이 모두 다릅니다.


일몰시간에 활주로 등을 켜놓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활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타는 듯한 붉은 노을과 함께 활주로 등은 시간이 갈수록 더 밝게 빛납니다. 지금도 제가 근무하던 공항에서는 야간 비행을 하는 항공기가 그림을 그리며 뜨고 내릴 것입니다.



출처: https://wallhere.com


지금은 이렇게 한가하게 글을 쓰고 있지만, 관제탑에서는 활주로에 있거나 상공에 떠있는 항공기를 통제하고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바쁩니다. 보통 수십대의 항공기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항공기에서 눈을 떼면 안 됩니다. 모든 항공기를 다 신경 써야 합니다.


관제사와 조종사가 주고받는 관제 용어가 전 세계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간단한 용어들입니다. 이륙 허가는 어떻게 할까요? 모든 항공기는 반드시 관제사에게 이륙 허가를 받아야 이륙할 수 있습니다.


Clear for Take Off


이륙 허가가 날 때까지 main 활주로 끝에서 잠깐 멈춰 있기도 합니다. main 활주로에 다른 항공기라도 들어가 있는데 이륙을 하면 큰일 나겠죠. 타워에서 컨트롤을 해줘야 합니다.


Clear To Land


착륙 허가입니다. 활주로에 아주 작은 물체가 떨어져 있어도 안됩니다. 깨끗한 활주로가 준비됐을 때, 조종사는 착륙 허가를 받고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것이죠.





기후가 좋지 않거나, 야간 비행과 같이 시야 확보가 어려운 경우에 주로 계기 비행(Instrumental Flight)을 하게 됩니다. 계기 비행은 항공기에 장착된 계기에 의존하여 비행하는 것입니다. 조종사가 직접 지형을 보고 항공기를 조종하는 비행 방식인 시계비행과 구분됩니다.


Decision Height


계기 비행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우리말로 결정 높이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입니다. 공항마다 활주로가 위치한 해발 고도나 활주로의 길이와 같은 물리적인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DH는 모두 다릅니다.


Decision Altitude(DA)와 Decision Height(DH)(출처:위키피디아)


활주로 상황이 좋지 않거나, 항공기에 문제가 생겨서 착륙을 못할 경우가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Low Approach를 해야 합니다. 다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Decision Height 아래에서는 더 이상 Low App를 할 수 없습니다. DH는 다시 올라갈지, 착륙할지 결정해야 하는 Dead Line인 것입니다.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착륙을 결정했다면, 착륙 모드로,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Low Approach 모드로 빨리 전환해야 합니다.


Decision Height는 계기가 알려주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에 관제사가 한번 더 체크를 하고 조종사에게 말해줘야 합니다.


Decision Height


착륙 단계에서의 중대한 결정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때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해야 하는 떨리는 순간,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리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Decision Height를 잘 파악해 놓아야 합니다.


복잡한 마음과 상황들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할지라도, 경험과 직관의 힘을 오롯이 믿고 다시 오지 않을 좋은 기회를 잘 살리시기 바랍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쾌적한 공항으로 유명합니다. 이용하는 인구의 수에 비해 공항이 크다고 합니다. 공항에서는 다양한 목적지로 출발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목적지의 수만큼이나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될 타이밍이 많을 것입니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관제탑



어둠과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Decision Height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또 다른 꿈을 향해 Low Approach를 해도 되고, 이제 여기서 그만 착륙을 해도 됩니다.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존하거나 조언을 갈망한 과거가 있었나요? 용기가 없어 중요한 결정의 순간, 고백의 순간을 날려 보낸 아쉬움은 없었나요? 그렇다면 이제부턴 여러분들의 직관이나 경험을 믿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용기가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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