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있는 미완(未完)이 인생의 참모습입니다.
싱가포르에 살면서 건전한 취미가 생겼습니다. 조깅입니다. 새벽에도 가끔 뛰지만, 최근에는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즐깁니다. 고온 다습한 싱가포르 기후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거리를 누비는 조깅 족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차드나 마리나베이와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 윗옷을 모두 탈의한 채로 조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퇴근 후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나갑니다. 저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맥주를 참 좋아합니다. 가끔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나가기도 합니다. 음주 조깅이 되겠군요. 물론, 완주하고 들어와 샤워를 한 후, 살짝 얼려둔 맥주를 마실 때의 청량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콘도의 뒷동산을 코스로 자주 이용했는데, 최근 새로운 루트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NUS, 홀랜드 빌리지, 보타닉 가든을 잇는 코스를 즐기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면 두 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물론, 조깅을 하면서 수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쳤습니다. 어두운 새벽에 길을 잃고 헤맨 일도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목표했던 코스를 완주하지 못하고 중간까지만 갔다가 버스를 타고 되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운동화를 신고 한걸음 나가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조깅을 하면서 상쾌한 싱가포르 공기를 마시면서 경치를 즐깁니다. 가야 할 길이 멀더라도 천천히 완주한다는 생각으로 합니다.
잘하는 것보다 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장거리의 조깅은 글쓰기의 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최근엔 책을 읽는 사람보다 책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합니다. 누구나 글을 잘 쓰고 싶어 합니다. 특히, 석사나 박사 학위 과정에 있는 대학원생이라면, 학위 논문을 잘 쓰고 싶을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지요. 완벽한 글을 쓰고 싶지만, 첫 문장을 쓰는 것부터 어렵습니다. 글을 더 이상 써 내려갈 수 없어,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시간을 정해 놓고 치르는 논술 시험의 답이라면 어떨까요? 중간에 쓰다 만 글을 높게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글이란 어떤 건가요?
저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늘 커다란 산이 앞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미 연구해 놓은 자료와 데이터들은 책상 한 옆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분석하고 정리해 나만의 글을 써야 했습니다.
매일 아침 상쾌한 공기를 즐기면서 연구실로 향했습니다. 연구실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이른 아침, 한가한 캠퍼스에서 커피 한잔을 즐깁니다.
그런데, 카드 키를 대고 연구실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세상이 바뀝니다. 오래된 책 냄새가 먼저 저를 반겨줍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꺼냅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입자들과 먼지가 뒤죽박죽 섞여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식사나 휴식 시간으로 잠깐씩 자리를 비울 때를 제외하곤 밤늦게까지 있어야 할 작은 공간입니다.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그 먹먹한 공기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답답했습니다.
어느 날 연구실이 있는 건물 1층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컵에서 미지근한 커피 향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커피를 마시려던 순간, 평소에 그냥 지나쳤던 한 포스터의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학위 논문 출판 업체에서 붙여 놓은 포스터에 있었던 문구입니다.
가장 훌륭한 논문은 ‘다 쓴 논문’입니다.
단 한 줄의 글이 답답한 마음을 위로해줬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고 건물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면서 저는 우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써보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매일 페이지수를 정해놓고 정해진 분량을 그냥 썼습니다. 시간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200페이지가 넘는 글의 마지막 마침표까지 찍게 되더군요.
꼭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질 때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잘 해낼 생각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해본다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요?
완성(完成)
이쯤에서 완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중국의 고전 <<주역>>을 살펴봐야 합니다. 주역은 우리 인생사 모든 경우의 수를 64개의 괘로 분류해 놓은 중국의 고전입니다. 그 마지막 64번째 괘가 무엇일까요? 바로 화수미제(火水未濟) 괘입니다.
어린 여우가 등장합니다. “어린 여우가 강을 다 건넜을 즈음, 꼬리를 적신다.” 여우가 완벽히 강을 다 건너가기 직전에 결국 꼬리가 젖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운행, 복잡한 인간사의 변화를 정리해 놓은 주역 책의 마지막 메시지가 역설적이게도 작은 실수가 동반된 미완(未完)의 화수미제 괘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궁극적인 완성이 없고, 완벽한 마침표는 영원히 찍을 수 없다는 놀라운 비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쓰는 일은 물론이고 어떤 일을 시작하면, 언젠가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일의 마지막 단계에서 조금 더 반성적이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고, 끝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탈고한 글이라면, 보통의 경우는 두 번 다시 읽기 싫습니다.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죠. 마감시간이 되면, 제출해야 합니다. 이젠 손을 놓고 보내줘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완벽한 글이라고 생각하고 제출한 글을 한참이 지나 다시 읽어보면, 수정해야 할 것들이 또 보입니다. 당연합니다. <<주역>>에서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가 바로 미완성입니다.
시간이 더 있었으면, 더 좋은 글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글입니다. 어디 글뿐 이겠습니까? 인생의 한 막을 내리고 또 다른 문을 열고 나가는 주인공들 역시 아쉬움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 끝내셨으면 잘하신 겁니다. 미완의 완성이기 때문에 또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먼 훗날 생각했을 때 추억으로 간직할 만한 그림을 그리고 계신가요?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언제까지 적도 위에 머물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선 이쯤에서 한 단락의 마침표를 조심스럽게 찍어 봅니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그것이 곧 삶의 참모습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새로운 시작이 더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