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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훈 Aug 03. 2022

이번 판의 희생타는 나야?

7월 30일, 좌천의 그날

심화되는 직장 생활의 암담함


전기차 바람이 폭풍이 되어 갔다.

거세지는 전기차 폭풍이 서서히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기존의 자동차 엔진 부품을 제작하던 회사에 맞게 엔진 기술에 특화된 엔지니어였다. 내게 전기차 부품들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기계 분야 전문이어서 전기, 전자 분야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렇다고, 전처럼 배워서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그럴 만한 의지도 열정도 식어버린 상태였다.


상사들의 압박은 계속되었다. 사실 나의 무능함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점점 무능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리고 앞이 보이질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여 잠도 오지 않았다.





내 월급은 저 ‘욕 값’, 견뎌야 한다.



새 먹거리 준비가 되고 있지 않다고 온갖 질책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이어지던 질책은 급기야 모욕적인 욕설로 이어졌다. 노골적 욕설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었다.


말리는 시어머니가 더 밉다. 같은 입장임이 분명한 직속 상사는 나의 무능을 탓했다. 하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상황이다. 의미 없는 신규 아이템의 조사와 연구만 반복됐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 회사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새로 온 총무 출신 대표이사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제품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소 탓으로 돌렸다. 기술진들의 허술함을 끊임없이 못 마땅해했다.


그즈음, 최고경영층인 회장단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기차 시대 생존방안을 마련하도록 대표이사에게 지시했다. 대표이사가 받은 숙제는 새로운 사업과 신규 아이템 발굴, 수주에 대한 대책이 골자였다. 그 숙제를 연구소 쪽을 압박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일생 동안 당해본 적 없는 모욕을 수 도 없이 당하기 시작했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를 악다문 채 혼자 되내었다.


“가만히 있어. 처자식 먹여 살리려면 견뎌야 해. 니 월급이 저 ‘욕 값’인걸 잊지 마.”


많은 사람들이 내 상황을 애틋해하였으나, 진심은 그저 남의 일일뿐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나는 사장도 임원도 아닌, 그냥 직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해야 할 몫과 또 그 정도의 스트레스를 내가 과하게 전가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술자가 아닌 대표이사는 그렇다고 해도, 연구소 직속 상사는 납득이 안됐다. 소극적 언행으로 뒤로 빠지면서 은근히 나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무능하여 본인이 곤란한 것처럼 내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은 전기차 부품 경험이 있는 고객사 임원 출신 인재를 뽑아와야 했다. 최소한 직속 상사를 포함한 회사의 모든 인원이 관심을 쏟아야 했다. 모든 일을 뒤로한 채 전기차부품 발굴에만 몰입해야 할 정도로 대대적인 것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사장이 못하면, 애꿎은 내가 아니라 임원인 그가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표이사의 태도가 변했다. 그러한 것들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쉽게 되는 일이 아님을 느낀 듯했다. 다행히 압박의 수위를 조절하였다. 그제야 겨우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잠깐이었다. 또다시 대표이사가 바뀌었다.


새로운 대표이사는 내게는 좀 특별하신 분이었다. 회사 창립 초기 몇 안 되는 직원들로 업무 할 시점부터 특별한 인연이 있다. 나를 직접 채용했고, 오랜 기간 함께 일했던 팀장님이셨다. 가정으로 보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앞선 대표이사처럼 부임 이후 줄 곳 새 먹거리에 대한 압박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엔 방향이 달랐다.


'사람을 바꿔야 한다'라고 했다. 기존의 인원들이 아닌 전기차 시대에 맞는 전동화 경험자로 사람을 바꿔야 한다고 말이다.


내게 조직개편 방안과 신규인원 충원을 지시했다. 나는 골똘히 새 조직을 짰다. 인원의 특성에 맞춰 업무를 분장할 안도 구상했다. 한편으로는 전기 모터 관련 경력자를 채용하고자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7월 30일.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7월 30일.

그날은 여름휴가를 앞둔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출근해서 아침부터 분위기가 냉랭했다. 직속 상사가 아침부터 좀 보자고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오늘 임원 승진 인사 발표가 있을 거라고 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3명이 승진한다고 했다. 모두 나와 비슷한 직급의 동료들이었다. 사내에 남은 또래 직급 중 유일하게 나만 임원이 되지 못했다. 흠칫 놀랐지만, 사실 그것을 섭섭해하기엔 내 처지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감정의 동요 없이 묵묵히 받아들이려 노력하였다. 그런데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직속 상사의 말투가 냉랭하여 뭔가 찝찝함을 주었다. 나는 그가 '박 부장은 좀 아쉽겠지만,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올 거라'라고 말해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섭섭함을 넘어서 인간인가 싶은 말을 했다.


"설마 속상해하거나,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 넌 아쉬워하지도 마라. 네가 그럴 처지는 아니야. 내가 말한 적 있잖아. 너 언젠간 역전당할 거라고.."


사실 그는 며칠 전부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대화도 길게 하지 않으려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이상하다 생각하였다.


심지어 어제는 사무실에서 버럭 소리를 질러 당황하였다. 다른 후배 직원이 하고 있던 일에 '점검을 제대로 한 거냐'라고 질책하듯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장난하냐~! 할 줄 아는 게 뭐냐~!"


깜짝 놀랄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나는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그가 나에게 그런 걸로 느껴지지 않았다.


후배 직원을 질책하고 싶은데, 너무 직급 차이가 많이 나니 내게 보란 듯이 오버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해도, 그럴 만한 거리의 일도 아니었다. 특히 너무 자존심이 상했다.


누구보다도 직접 많은 일을 해보고 겪어서 현실감이 좋은 게 내 장점이라고 생각해왔다. 정말 기가 막혀 분노와 짜증이 확 올라왔다.


'평생 직접 해본 적이 없어서 잘 알 리가 있겠냐고..?'


하지만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구차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다음날, 동료들의 임원 승진 사령식이 있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아, 하루 종일 멍해 있었다.


오후에 통합연구소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둘이서 화상회의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뭔가 이상했다.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등골이 싸늘해졌다. 군포에 파견 나가 있던 후배와 내가 포지션을 바꾼다고 하던데 알고 있냐고 물었다.


당혹스러움에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하자, 그분도 당황했는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당사자에게 이야기도 안 하고 본인에게 갑자기 연락해 컨펌해달라고 계속 독촉했다고 한다.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듣고 있는 내내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온종일 직속 상사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의실로 날 불렀다.


5년 후배와 자리를 바꿔 미래사업연구소로 가라고 했다.


‘후배에게 박 부장 자리를 내주라'라고 했다. 대신 ' 군포 미래사업연구소 팀원으로 발령을 낼 것’이라고 했다.


전기차 시대 도래로 신규 먹거리에 대한 압박이 심하여 뭔가 변화를 줘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박 부장이 혼자 남아서 연구소를 운영해도 됐겠지만, 지금 이대로는 우리 둘 다 답 없이 답답함이 계속될 뿐이라고 했다. 가서 일하고 있으면, 5~6개월 뒤 연말에 중국법인 총경리(사장)로 승진해서 갈 기회가 생길 것 같으니 잘 참고 있으라는 말을 했다.


사실 몇 주 전 비슷한 제안을 했었다. 나는 집안 사정 상 아픈 아이가 있어 중국에는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었다.


그는 박 부장이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 본인이 중국으로 밀려가게 될까 봐 미리 나를 내정하려고 하는 소리로만 들렸다.


이번엔 박 부장 입장도 달라졌으니,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대표이사의 마지막 배려 차원이라며, 부회장에게까지도 이야기가 다 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늘 그랬듯이, 선생님 같이 듣기 싫은 인생 훈계를 해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부장인 내게 어린 사원에게 하듯 입에 발린 훈계를 할 때면 나는 눈동자에 힘을 풀고, 허공을 영혼 없이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었다.


' 저 사람은 대체 얼마나 날 우습게 여기는 것일까?'


끔찍할 정도로 질려버린 반복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날은 특히 참을 수 없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나도 더 이상은 못 듣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그가 지금까지 늘 하던 말과는 좀 다른 말을 꺼냈다.


"사실 그만두고 나가면 이게 다 무슨 의미냐.. 회사 안의 이런 것들, 너나 나나 밖에서 보면 평범한 사람들일 뿐인데.. 누가 잘나고 못나고 할 것도 없고, 다 거기서 거긴데 말이야.."


파견지로 유배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이미 앞날이 정해져 있단 이야기였다.


형식은 좌천이지만, 사실상 그만두라는 얘기였다.





자발적 퇴사를 강압하기 위한 ‘모욕주기’



갑자기 몇 해전 그만둔 임 부장이 떠올랐다.




아마 그때가 50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의 자발적 퇴직 또한 그의 작품이었다. 자기 밑으로 데리고 있던 생산관리 팀장이었는데 1년 동안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핀잔을 준 것 같았다. 오랜만에 봤던 임 부장은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모습이었다. 예전과는 다르게 간단한 발표에도 심하게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얼마 뒤 전혀 상관없는 총무팀 팀원으로 보내어 당진의 말단 업무를 보게 하였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자발적 퇴사를 강압하기 위한 ‘모욕주기’였다.


같이 한솥밥을 먹던 사람을 저렇게 쉽게 모욕을 주어 쫓아 내려한다는 사실에 냉정함을 넘어선 비인간적인 냉혈한들이나 할 일로 보였다. 내가 입사한 이래로 전래 없던 일이었다. 우리 회사는 크지 않은 회사이지만 최소한 서로가 인간적으로 모두들 가깝게 지내는 것이 큰 장점이라고들 말하던 때가 있었다. 일이 힘들지 사람 관계는 어디보다도 좋다고들 말하여 왔었다.


누구의 머릿속에서 저렇게 지저분한 생각이 나왔을지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였었는데, 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지금의 내 직속 상사였었다.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것이 명확히 느껴졌다.




그는 진작부터 그런 속내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연구소를 향한 온갖 욕설과 비난은 내가 다 받았다. 그런 자리에선 입을 꼭 닫고 투명인간처럼 있거나, 한쪽으로 비켜섰었다. 하지만, 최근의 회장단의 압박과 대표이사의 교체까지, 이제는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분명 과거의 모든 원죄를 내게 뒤집어 씌운 채 깔끔히 잘라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나와 같이 함께 부임해 온지 3년이 다되어 간다.


3년이나 R&D 수장이었던 그가 과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알 것 같았다.


" 3년 전부터 한 것은 내가 한 게 아니야. 이제 적폐를 도려냈으니, 지금부터가 내가 시작하는 거야."


하지만, 그가 날 꼬리 자르기 하려 해도 무조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회사 내 연구소에서 내 입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내색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임부장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섣불리 시도했다간, 나를 파내지도 못하고 그의 생각만 탄로 날 것이다. 그럼 나와 트러블만 생길 테니까. 그의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분명 그와 죽이 맞은 누군가가 있다. 나에 대한 인사권이 있고, 내 좌천이 필요한 사람.

몇 주전 새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날 대표이사가 한 말이 번뜩 스쳤다.


"너 때문에 네 상무도 방향을 잘 못 잡아서 저러고 있는 거다."


토요일, 직속 상사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나 혼자 R&D 전략에 대해 독대 보고할 때였다.


전략은 짠 건 나의 독단이 아니었다. 내가 연구소의 방향을 망치고 있는 듯한 표현으로 들렸다. 회사 미래에 대한 이 정도 전략은 대표이사나 담당 임원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비겁하게 모두들 나의 뒤에 서서 무능을 질책했었다.


사실 대표이사도 전례를 보았을 때, 사람 보내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수십 명 집에 보냈음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했다.


무언가 본보기로 분위기 쇄신할 거리가 필요한 듯했다. 최고경영층에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과거의 적폐를 몰아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겠다는 신임 대표이사의 의지 같은 것 말이다. 


적폐? 내가 적폐라니..


두 사람, 아니 부회장까지 세 명이 모두 내 동문선배였다. 셋이 모여 조직개편과 인사발령 건을 이야기하다 내 얘기를 했다고 한다. 부회장은 보고를 받다가 의아해했다고 한다.


“한창 잘 나갔었는데.. 경훈이가 어쩌다 이렇게 됐냐..”


날 좌천시키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내 험담을 했을 것을 생각하니 기가 찼다.


공교롭게도 20년이 다 되어서진퇴양난의 외통수에 빠져버렸다.





‘내가 이번 판의 희생타이구나’



나는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인상 깊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극 중 삼 형제 중 막내인 송새벽 배우가 여배우와 연애를 시작하던 시점에 한 장면이다.


그동안 여배우가 영화 촬영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떨어지고 자기 비하가 심해지다 못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술에 취해 막내를 찾아오곤 하였었다. 결국 끝내 분노한 막내가 영화감독을 찾아가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설마 설마 했다. 나 같은 놈이 또 있는 줄 몰랐다. 내가 눈물 난다. 나보는 것 같아서…… 우리 그러지 말자. 괜히 애 잡고 그러지 말자. 너 왜 그런 줄 알아. 진짜 안다고 나는…… ‘아니 애 연기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아니. 더 깊이 내려가 봐. 내가 너한테 무슨 말 하고 있는 건지. ‘아니. 알긴 뭘 알아요.’ 다 안다고. 너하고 나만 안다고. 우리가 얼마나 치사한 새낀지. 너 몰랐는데 연기시켜 보니까 알겠지. 네 시나리오 엄청 구린 거. 다들 그래 종이에 써져 있는 거 보면 몰라. 찍다 보면 감 와. 망했다. 그 딴 걸 같고 전도연 데리고 오면 뭐 달라질 것 같으냐? 애 하나 족쳐서 빠져나갈 생각 말고 그냥 찍으라고. 너 그러다가 내 꼴 나, 이 자식아.”



“십 년 전에 너랑 찍던 그 영화. 찍으면서 알았어. 망했다. 큰일 났다. 찍어서 걸면 100% 망한다. 난 재기도 못할 것 같았어. 난 그냥…… 어쩌다 천재로 추앙받는 거란 거…… 알았어. 근데 천재이고 싶었어. 천재로 남고 싶었어. 다시는 영화 못 찍고 굶어 죽어도 천재로 남고 싶었어. 그래서 네 탓하기로 한 거야. 내가 구박하면 할수록. 네가 벌벌 떨면서 엉망으로 연기하는 걸 보면서 나 안심했어. 더 망가져라. 더 망가져라. 그래서 이 영화 엎어지자.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 쟤가 무능해서 그렇다. 반쯤 찍은 거 보고 제작사가 엎자고 했을 때, 안심했어. 사내 새끼들도 치사한 게 당할 애를 알아봐. 조지면 망가질 애 알아봐. 너 찍혔어. 그 자식한테 희생타로 찍혔어. 왜 거기서 찍혀.”



나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촉촉이 젖어가는 눈시울을 누군가 볼까 얼른 사무실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퇴근시간이 되자 휴가를 떠나는 직원들이 내 자리로 우르르 몰려왔다.


"부장님, 휴가 잘 다녀오십시오."

무의식 중에 잘 다녀오라 인사를 하였지만,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직원들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내가 밀려나 군포로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감이 잘 안 왔다.


모두들 퇴근하자 적막한 사무실에 홀로 남았다. 그룹웨어의 공지사항을 보니 인사명령이 올라왔다. 예고한 그대로였다. 팀장, 팀원이 바뀌어 있었다. 전 사원이 이 공고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모욕감이 밀려왔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짐을 빼야 했지만, 도저히 회사에 있을 수 없었다. 황급히 맨 몸으로 도망치듯 사무실을 나왔다. 연구동 건물 3층 계단을 한걸음에 내려왔다. 1층 식당을 통과해 주차장으로 가려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멈칫했다. 대표이사와 직속 상사가 둘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피해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먼저 휴가 잘 보내시라고 인사를 했다. 대표이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경훈아, 휴가 때 뭐하냐? 할 일 없으면 나랑 놀게 출근이나 해라."


농담을 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직속 상사가 대표이사가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두 번 '까딱까딱' 했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빨리 사라지라는 의미였다. 인간 같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버무리며 인사를 하곤 황급히 돌아서서 식당을 나왔다. 빨리 그들과 멀어지고 싶어 차에 타자 마자 액셀을 밟았다.

두 사람이 너무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나쁜 놈들.. 나쁜 놈들.. 나쁜 놈들.."


회사에서 멀어지자, 그제야 앞이 너무 뿌였다는 생각을 했다. 눈이 시큰 거리고 따가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많은 사람이 떠올랐다. 여기저기 많은 사람이 날보고 웃고 있는 것만 같다. 쯧쯧 혀를 차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게 정말 나에게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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