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이후의 삶을 글로 쓰겠다던 호기로운 결심은 일상의 피로에 밀려 모든 일과의 후순위가 되었고, 어느새 잊혀 버렸다. 문득 생각난 블로그와 이곳에 들어와 어렸을 적 일기장을 뒤적이듯 예전에 쓴 글 몇 개를 대충 읽고는 다시 창을 닫기를 수 차례.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오빠, 요즘은 글 안 써?" 그러게 말이다. 글 쓰는 게 제일 좋다며, 글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게 꿈이라던 내가 요즘은 글을 쓰지도 않고 읽지도 않는다. 이센스의 가사처럼 '야, 요즘 내가 변했냐'라고 자문해보자면 난 좀 예전과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왜 변했느냐고? 하는 일이 변하니까 사람이 변하더라. 내가 영어를 잘해서 해외영업을 했던 게 아니다. 해외영업을 하니까 영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잘하게 되더라. 내가 맡은 업이니까,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잘하기 위해서 학원도 다니고, 전화영어도 했다. 내가 매일 하는 일 덕분에 능력이 향상되고, 머리도 어쨌든 그쪽으로만 돌아갔던 거지. 고향에 내려와 하는 일이 달라지니 나의 일상 패턴도, 업무 역량도, 달라지더니 급기야는 나 자체가 바뀌어가고 있다. 나의 업무는 거칠게 말하자면 '잡부'다. 노가다 현장에서 잡부라면 말 그대로 아무 일이나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현장에 있을 땐 나도 아무 일이나 다한다. 현장을 청소하는 일부터, 필요한 자재를 사다 나르기도 하고, 경광봉을 들고 현장을 통제하기도 하고, 커피를 타 주기도 하고, 작업자들의 행동이 맘에 안 들면 그냥 내가 먼지 구더기 속에 기어 들어가 일을 하기도 한다. 사무실로 돌아오면 협력 업체들 결제를 해주고, 세무사를 만나서 세금을 의논하고, 월급날엔 근로자들 월급을 주고, 어떤 날엔 일찍 나와 사무실 청소를 한다. 대중없고, 맥락이 없다. 그야말로 '좋소의 삶'.
명백히 해야 되고, 그 능력을 향상해야 되는 것들은 있다. 캐드 실력이라던지, 현장을 보고 견적을 산출해야 되는 것들. 엔지니어링에 관한 지식들을 익혀야 하지만 natural born 문과라서 그런지 배우는 시간도 더디고 딱히 내가 공부해봐야겠다는 의욕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네가 다 할 줄 알아야 사업을 해 나갈 수 있다'라는 주의시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씀이다. 다 할 줄 아셔서 지금 이만큼 이뤄놓으신 거니까. 그러나 내 생각은 '잘하는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것을 하자'라는 생각이다. 내가 모든 것을 컨트롤할 수 없다. 그러니 능력이 있는 직원을 고용해서 필요한 포인트에 그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물론 관리자가 알고 시키는 것과 모르고 시키는 것은 천지 차이라 관련 지식을 충분하게 갖고 있어야 되는 것은 맞다.
이야기가 샜다. 아무튼 결론은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내 삶은 '글'과 '언어'와는 조금 멀어져 가고 있다. 이십 대에 가장 내가 천착했던 주제들인데 말이다. 삶과 시간은 이렇게 죽고 못살겠던 것들과도 부지불식간에 거리를 만들어 내더라. 음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음악을 찾아 들은 지 오래고, 어느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줄줄 읊으며 영화를 보던 것도 옛날 얘기다. 김광석의 노래처럼 언제고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나이는 나도 낯선 나를 만들어 낸다.
예전 블로그에도 가끔씩 나의 글을 기다렸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내도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다니 틈이 나는 대로 다시 뭐라도 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