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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화자 May 11. 2019

나의 서울 유랑기 - 강북 편

 고향으로 내려갈 마음을 굳히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15년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9년의 학교 생활, 6년의 회사 생활을 떠올리기도 하고, 블로그에 써놓은 앳되고 푸른빛이 성성한 글을 읽어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제가 서울에서 살았던 곳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15년간 대략 8~9번의 이사를 한 것 같습니다. 정리를 지독히도 못하는 제가 이삿짐을 싸는 것은 고3 시절 수리 문제를 푸는 것만큼이나  곤욕이었고, 하기 싫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마다 경제 사정과 이런저런 주변 사정 때문에 새로운 방을 찾아 떠나야 했습니다. 전역 이후에는 이사 때마다 항상 지금의 아내가 저를 다독여가며 이사를 도와줬습니다. 아내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처음 생각했던 것도 좁은 자취방에서 이삿짐을 싸던 순간이었습니다. 동네 동네마다 저의 기억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인 곳이라 오늘은 그 얘기를 좀 써보려 합니다.


 



 서울에서 가장 처음 머물렀던 곳은 성북구에 있던 학교 기숙사였습니다. 5평도 되지 않는 곳에 4명의 사내들이 머물러야 하는, 1인당 면적으로 보면 고시원을 방불케 하는 그런 곳이었죠. 첫 서울 생활을 하며 숙식을 함께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기숙사 멤버들 중 2명이 제 가장 친한 대학시절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1학년 1학기의 기숙사에 대한 기억은 알코올 냄새뿐입니다. 내가 취해있거나 다른 놈들이 취해있거나 혹은 같이 취해 있거나. 1학년의 기숙사 생활은 그렇게 휘청거리며 지나갔습니다.


 2학년 땐 중국인 유학생 두 명과 방을 썼습니다. 이게 결정적으로 제가 중국 교환학생을 가지 않은 계기가 되었죠. 생활 방식이 다른 걸 인정해야 했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잘 씻지도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건 정말이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엄청 싸웠죠. 그러면 안됐지만 어리석게도 저는 중국인들이 너무 싫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남학생들은 대부분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는데 저 혼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심한 것도 이 중국인 룸메이트들 때문이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처음 자취 생활을 시작한 곳은 학교 앞 원룸이었습니다.. 엄마는 제가 원룸에 들어가기 몇 주 전부터 집 베란다에 제 이삿짐을 하나하나 쌓아놓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엔 소주잔과 겔포스까지 있을 정도였죠. 원룸은 대학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5평, 당시 시세로 500에 40짜리 방이었습니다.  300만 원이 넘는 한 학기 등록금, 40만 원의 월세, 30만 원의 용돈까지. 넙죽넙죽 받아쓸 땐 몰랐는데 성인이 되고 나니 그게 얼마나 큰돈이었는지 실감이 납니다. 그때 일기엔 이렇게 적혀 있네요.

  

 "새 옷을 입었으면 기분이라도 좋으련만 시한부로 갖게 된 방은 영 어색하고 낯설었다."


 계획대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았습니다. 출국은 5월이었고. 원룸 계약은 2월 말로 끝이었기 때문에 머물 곳이 애매해졌습니다. 캐나다 가기 전까지 돈을 모을 요량으로 알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적당한 고시원에 있으면 될 것을 돈을 아끼겠답시고 ‘피터팬’ 카페에서 셰어 하우스를 구했습니다. 은평구 구산동 어딘가였는데 꽤 오래된 빌라였습니다. 방을 보러 갔을 땐 집을 치워놔서 그랬는지 몇 달 지내기엔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사를 하는 날 다시 본 집은 처참했습니다. 제가 살기로 한 방엔 온통 곰팡이 투성이었고, 집엔 온통 악취가 풍겼습니다. 제가 항상 짐이 많은 스타일인데 짐을 다 넣고 보니 대각선으로 누우면 발이 벽에 닿을 정도로 좁았습니다. 방을 닦고 또 닦았고, 향수와 페브리즈를 쏟아부었습니다. 이사를 도와주던 여자 친구가 없었다면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가 먹던 라면을 뒤엎은 것처럼 제 세간살이들을 모두 엎어버리고도 남을 기분이었습니다.


<우아한 세계>에서 제일 좋아하는 라면 씬



 밤늦게 이사를 마치고 여자 친구를 이름도 생소했던 연신내역까지 바래다주고 방에 돌아온 저는 사실 그날 잠자리에 누워 울었습니다. 돈 몇 푼 아끼자고 이게 다 뭔가 싶었고 그냥 서럽더라고요. 그런데 살다 보니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같이 사는 사람 중에 한 명이 히키고모리였던 겁니다. 집도 음침하지 사람들이 잘 치우지도 않아 집안은 온통 쓰레기 더미인데 같이 사는 사람 중 한 명은 오밤중에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결국 한 달만 살고 뛰쳐나왔습니다. 종종 그때 얘기를 하곤 하는데 아내는 그곳을 'SOS 집'이라고 부릅니다.


 뛰쳐나와서 간 곳은 같은 과 선배의 집이었습니다. 그땐 몰랐습니다. 그 형이 알코올 중독이었다는 걸. 제가 얹혀사는 와중에도 이 형이 근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이쯤 되면 저는 정말 이사의 아이콘), 집안 곳곳에서 다람쥐가 숨긴 도토리처럼 빈 소주병이 산더미 같이 나왔습니다. 형은 매일 밤 저를 붙잡고 술을 먹었고, 저는 그때마다 형 그만 먹으라고 싸우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선배였습니다. 자기 만의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형 잘 지내요?)

 

 캐나다에서 돌아와서 구한 집은 보증금 2000에 월 10만 원짜리 원룸이었습니다. 사실 원룸이라고 하기에도 좀 민망한데 구축 2층 집을 개조해 방을 쪼갤 대로 쪼갠 조금은 기형적인 집이었죠. 제 방은 특히 작았는데 방의 일부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있어 아내는 그곳을 ‘해리포터 집’이라 불렀습니다.

 

 방은 정말 작았습니다. 여유 공간이라고는 두 사람이 불편하게 겨우 앉을 수 있는 정도가 전부였죠. 그런데도 크리스마스라고 여기에서 촛불을 켜고, 파스타를 만들어 와인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떻게 그랬나 싶을 정도였죠. 제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 집에서 이사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인턴을 하고 있었는데 이사가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퇴근을 하고 밤늦게 이사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방은 코딱지만 한데 짐을 싸면서 보니 책과 옷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제가 엄두가 안나 손을 못 대고 있자 도와주러 온 구여친현아내는 말했습니다. “오빠, 짐은 내가 쌀 테니까 하라는 것만 해줘.” 새벽까지 척척 짐을 싸 내는 아내를 보니 '이 여자랑 결혼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힘들다는 소리, 싫은 소리 하나 없이 그렇게 새벽까지 짐을 싸고 새 원룸에 짐을 풀고 청소까지 해주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요.


 좁디좁은 '해리포터 집'을 떠나 자리 잡은 새로운 원룸의 침대에 걸터앉아 저는 혼잣말을 되뇌었습니다. '넓네, 넓다.' 그렇게 저의 낙성대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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