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몸과 정신을 나누는 이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우리의 몸과 정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밝혀 낸지 이미 오래전이다. 우리의 뇌는 피부 저 깊숙이 신경조직망 사이사이로 각각 긴밀히 연결되어 대단히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하나와 전체로 움직인다는 것! 사랑조차도 뇌의 신경조직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화학적 반응일 뿐이라는 뇌과학설을 듣다보면 메마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에 철학과 문학, 신화, 정신분석, 심리학의 옷을 입혀서 정신병리적인 현상들을 파헤친 책이 있다. 정신분석학자 디디에앙지외가 피부의 진실을 에스프리적으로 이론화 했다. 제목에서부터 풍겨지는 세련된 조합이 예사롭지가 않다. 에스프리(esprit)한 언어들이 인체의 모든 장기를 세련되게 도식한다.
‘나는 거대한 신체기관이다. 나는 가장 무겁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과 세상의 경계입니다. 내가 무너지면 당신도 무너집니다. 나는 곧 당신 자신입니다. 나는 당신의 피부입니다.’ -피부 자아 Le Moi - peau 중에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몸은 나를 내보이는 첫 걸음이며 나의 정체성을 견지해주는 것 또한 나의 몸이다. 슬픔으로 가득한 생이, 삶을 이어 갈 수 없게 할 때조차도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 하는 생리적 순환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몸이 정신을 가장 깊숙이, 무의식까지도 유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포 하나하나가 정신이며 그 세포로 이루어진 피부가 지니는 메카니즘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이 디디에의 이론이다.
내 이야기를 하자면, 젊은 날에 몇년동안 메이크업 일을 했었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을 하시는 엄마옆에서, 죽어도 머리카락만은 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 표면적으로는 동질의 일인 것 같으나 지극히 다른 일- 메이크업을 배우고 일을 하면서는 전혀 다른 양상의 태도를 보였었다. 피부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유독 즐거웠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 이유가 유추된다. 머리카락은 계속 잘라내는 작업을 나에게 연상 시켰다. 무언가 잘라낸다는 것은 박탈을 의미한다. 반면에 그리는 일은 - 그것도 피부에 그리다니! - 감싸고 덧칠하는 작업이다. 유아 초기단계부터 지속적으로 엄마와의 스킨십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나로서는 타인의 피부에 그리고 덧칠하는 일이 타인과의 소통을 긍정적으로 이끌어준 하나의 획득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다행인가. 추측컨대, 그리면 그릴수록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났었던 그 시절, 소기의 체험은 흔들리던 이십대에 나로서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고 하나의 통찰로 연결되어 질수 있었던 피부자아(심리적 싸개 enveloppes psychiques)였으리라,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우리는 무엇을 보거나 읽게 되면 분석을 하거나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시종일관 해석을 하면서 읽으려고 하면 불만족스럽거나 불편할 수도 있다. 명징하지만 은유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으로, 감각과 직관으로 읽다보면 우아하고도 지적인 또 하나의 시를 읽는 기분이 들 것이다. 또한 상처 입은 사람 입장에서 읽다보면 정신 분석가이자 심리학자였던 디디에의 사고와 연상 속에 빠져 들어 스키마로 영입되는 스스로를 느낄 수 있다. 상처 많았던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