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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Oct 22. 2022

<정원가의 열두 달>카렐차페크

독서기록


“차페크씨! 당신 너무 귀여운 거 아닙니까?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당신의 정원을 꼭 보러 가고 싶어요.”


차페크의 정원은 작은 벌레들조차도 행복하게 살 것 같다. 만화 같은 상상력을 안겨주는 이 책은 유쾌하고 발랄하고 재미있다. 그러다가 특유의 진중함으로 사회를 풍자하고, 기민한 감수성으로 예리하게 순간을 포착한다.


내게는 땅을 일구어야하는 정원은 없지만 일상의 단비 같은 베란다 정원은 있다. 커다란 정원은 아니기에 식물집사의 일과는 차페크씨처럼 대단하지는 않다. 겨우 물을 주는 정도이고 가끔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주는 정도이다. 그렇지만 그 작은 정원에서도 엄청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그 에너지는 소중한 양식이어서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책을 읽다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차페크씨가 알려준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정원가들은 미래를 위해 살아간다…….이 작은 새싹이 몇 년 후 나무로 자라나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나에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은 늘 한 발짝 앞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시간은 무언가를 자라게 하고 해마다 아름다움을 조금씩 더한다.’


우울이 나를 집어 삼키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미래가 아닌, 현재에 살아보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미래까지 꿈꿀 여력이 없다고만 여겼었는데, 식물을 키우는 나는, 나도 모르게 식물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는 자각이 퍼뜩 들었다. 우울이 압도하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보고 있었구나, 그것이 식물을 통해서 얻어진 거라니, 고마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차페크씨가 살아있다면 가벼운 인사 한마디를 건네고 싶다. 차페크씨! 나무는 잘 자라고 있는거죠? 식물을 키우는 일은 백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작은 깨달음을 준답니다. 고마워요, 차페크씨!


끝!





추신)

토요일이다. 남편도, 딸아이도 외출하고 혼자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그들이 들으면 서운할까? 하지만 나도 충전을 하려면 혼자만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다. 혼자 잘 놀고 혼자 잘 외로워하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갖 것을 다 하느라고 에너지를 두배 세배로 소진하다가 번아웃 되는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베란다에 누워서 하늘을 오래오래 바라본다. 오늘 하늘은 축축하게 내려앉은 하늘이다. 시퍼런 하늘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이 축축함도 좋다. 홀가분하게 내가 좋아하는 하늘을 넋놓고 바라보는 일은 식물들을 바라보는 일 못지않게 사랑하는 시간이다. 사랑하는 시간이 언제나 내게는 짧아서 안타깝지만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다해 바라본다. 하늘을 뚫어져라 응시하다 보면, 내 머릿속을 무한 우주로 날려 보내는 것 같은 아득함과 멍청해지는 느낌이 온다. 그리고 그 순간만 느낄 수 있는 통증이 있다. 그것은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나는 통증이다. 베란다에 누워서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일을 했을 뿐인데 통증이 느껴지다니! 혹여 나는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서 떨어진 미아가 아닐까 생각한다.....훗!


https://youtube.com/watch?v=1Qjoffl_Lgo&feature=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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