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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하 Feb 29. 2024

사랑을 그리다, 백일홍

엄마의 정원




엄마의 정원에는 꽃들이 한창이다. 당신이 씨를 뿌려서 쉴 새 없는 노동으로 가꾼 정원이다. 어디 하나 소홀한 곳 없이 사랑과 정성이 그득하다. 아기자기, 알록달록,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수수하게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나는 여름 정원을 가장 좋아한다. 장미는 그 출발의 신호탄이다. 초여름부터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울타리를 따라 영국 장미가 피고 진다. 보랏빛을 흩뿌리며 한여름의 서정을 우아하게 그려내는 작약도 겹겹이 피고 진다. 칸나의 선연한 빛깔은 핏물처럼 진해서, 모든 여리여리한 꽃들을 기죽이듯 피어난다. 그 밖에도 이름 모를 야생화가 여러 군락을 이루며 구석구석에서 피고 진다.


세상에 안 예쁜 꽃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엄마의 정원에서 가장 예쁜 꽃을 꼽으라면 단연 백일홍이다. 한여름의 끄트머리를 장식하며 파도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백일홍은, 유약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강인한 목대를 가지고 있다. 그 강인한 목대가 흐트러진 일렁임을 보다 균일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백일홍은 딱 백일 동안 피었다가 진다고 하여, 백일홍이라 부른단다. 또 백일홍의 전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명하다. 옛날에 어떤 처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자, 이무기에 잡아먹힌 줄 알고 슬퍼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리에 꽃이 피어났다 하지 않던가. 그 순결한 그리움과 기다림이 서린 꽃이다. 아니나 다를까, 꽃말도 순결, 그리움, 기다림 이란다.  


어느 여름의 끄트머리, 백일홍 무리들 사이에서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말았다. 갑자기 백일홍의 전설과 꽃말이 떠오르면서 거기 서있는 엄마를 바라보자니, 불쑥, 마음을 후벼 파는 바람 한 줄이 휙 지나갔다. 울컥 목이 메고 눈물이 고였다. 엄마의 전생애가 백일홍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여, 평생 무엇을 그리워하며 기다리길래 해마다 백일홍을 지천으로 심는가.


엄마는 나이 마흔에 남편과 사별을 하였다. 내가 마흔이라는 나이를 이미 오래전 훌쩍 지나고 보니 그 나이는 꽤나 젊은 나이다. 그 젊은 나이에 혼자서 자식 둘을 키웠다. 나와 남동생이 결혼을 하고 난 후부터는 지금까지 쭉 혼자 사신다. 그런 엄마가 너무 외로울까 봐 남자친구라도 사귀어 보라고 하면, '네 아빠를 너무 사랑해서 그럴 수 없다'는 대답만 자분자분 돌아왔다. 애절한 로맨스를 품은 엄마다. 그렇게 홀로 삼십칠 년이 지났다. 엄마는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하느라고 백일홍을 심는 건가. 연민 가득한 응어리가 가슴으로 또 한 번 훅 스쳐간다.


아버지가 허망하게 돌아가신 후, 엄마는 아들만을 귀하게 키웠다. 딸인 나는 늘상 허허로운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도려낼 수도 없는 엄마에 대한 깊은 애증이 오랫동안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휘저으며 강산이 몇 번 바뀌다 보니, 이제 나도 늙어가는 중인 거라. 늙은 나는, 그 허물어지고 몽그라지는 마음에, 엄마가 아닌 한 여자의 일생을 새긴다. 그리하여 백일홍에서 엄마의 순결무구한 사랑과 그리움을 본다. 뿌리째 잘려나가는 배신을 당하고도, 평생을 진창에서 자식 둘을 키우고도, 언제 그런 고생을 했는지는 다 잊어버리고는, 그 예쁜 정원에서 눈부신 그리움을 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사랑받지 못한 여자가, 평생을 한 사람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를 보고 깨닫는다.


일흔 일곱 엄마의 일생이, 그 사랑이, 그래서 오늘 이토록 찬란하다. 엄마의 그리움은 백일이 아니라 평생토록 만개했다. 앞으로도 쭉 만개할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숭고함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이가 빠지고 등도 구부정한 엄마를, 이제야 비로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애증 서린 마음조차 극적으로 탈바꿈하여, 사람을 이리도 순하게 만들어주는 자연은 정말로 위대하다. 백일홍아, 고맙구나. 그리움의 혼이 들어 있는 백일홍을 마음에 스윽 품으니, 마음 바닥부터 뭉글뭉글해진다. 나는 이제 오래도록 백일홍을 볼 때마다 늙은 담장에 서있던 야윈 엄마를 그리워할 것 같은 예감이다. 그 몽환적인 여름 끄트머리 햇살과 함께 말이다.






 *** 여름 끄트머리에 찍은 엄마의 뒷모습입니다. 사진을 들춰보다가, 그 때의 소회를 풀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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