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 연민이라도 품어야

<타인의 고통>을 읽고

by 쇠네스보헨엔데

또다시 전쟁이다. 4년 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터졌을 때만 해도 21세기에 국가 간 영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 있었던 같다. 그러나 이번엔 두바이 공항이 드론 습격을 받았을 때 잠시 요동했던 분위기도 금세 덤덤하게 가라앉는 분위기다.


포화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호르무즈 해협에만 쏠려있다. 오늘 몇 발의 미사일이 떨어졌는지, 그래서 몇 명이 죽었는지는 크게 보도되지 않는다. 대신 한국으로 석유를 실어나르는 유조선이 좁은 해협을 통과할지 말지가 핵심으로 여겨진다.


폭격을 받은 초등학교 앞마당을 멀찌감치 부감으로 찍은 사진에는 눈물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나란히 뉘인 어린이 시신 수 백구는 고요한 정물처럼 보인다. 드론 공격을 당해 철골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건물들에서도 절규가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내 주가가 떨어지고 내 차에 넣을 휘발유 값이 올라가고 쓰레기 봉투가 부족해지리란 소식에 더 절박하게 반응한다.


시대는 날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나는 그 시대를 질타하는 글을 읽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오랫동안 읽기를 미뤄오던 <타인의 고통>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응시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불행에 대한 사랑" 혹은 "잔악함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하는 책을 읽으며 내내 낭패감을 느꼈다.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류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뻔뻔한 연민'이라는 힐난은 나를 아프게 했다.


어젯밤 남편과 어쩌면 이번 여름 계획했던 독일 여행을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얘길 나눴다. 마일리지로 항공권 두 장을 미리 예매하고 나머지 한 장은 구매를 미루고 있었는데 그새 항공권 가격이 훌쩍 올라버린 것이다. 항공권 뿐 아니라 숙소 가격과 교통비도 오를 것이며 무엇보다 환율이 치솟고 있었다. 이것이 내 생활에 떨어진 전쟁의 직격탄이다. 첫 유럽여행에 설레하던 아이에게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하기가 안쓰러우나 이란에서 폭격으로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그들의 고통을 나의 특권과 연결할 고리가 보이지 않는다. 아디다스 축구공과 남아시아 어린이의 값싼 노동력처럼 인과가 직렬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란의 어머니와 나는 사슬로 연결되는 논리의 구조가 아니라 곤죽처럼 뒤엉킨 관계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이 "전쟁과 악랄한 정치"를 타파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마저 그만둔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11년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에서 슬라보예 지젝이 했던 명연설 앞에 아연했던 심경이 떠오른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깡통을 재활용하는 일, 자선 사업에 푼돈을 기부하는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사면서 1%가 제3 세계 기아 아동을 돕는 데 쓰이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말은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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