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아버님 생신을 맞아 가족 모두가 여행을 다녀왔다.
결혼 12년차가 되니 이제 시댁이 편해진 것도 같다. 결혼하고 처음엔 어머님의 무시하고 하대하는 태도에 속상한 적도 많았다. 우리 어머님은 흔히 말하길 '보통이 넘는 분'이다. 자식 사랑이 대단하고 자존심도 세시고 본인이 제일 똑똑하다 생각하시는 분이다. 결혼 초기엔 그저 눈치보고 속상해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에 들고 싶어하고 부당한 말을 듣고도 당당히 내 의견을 말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지금은 속 시원하게 말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금 둔감해졌다. 그리고 어머님께서 많이 유해지셨다. 아가씨가 결혼을 한 이후로.
우리 아가씨는 남녀평등을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인데 고모부가 아이 케어를 거의 다하고 아가씨는 끼니도 거의 배달음식으로 해결한다. 내가 아가씨처럼 행동했다면? 우리 어머님에게 난 아마 쫓겨났을 것이다.
그래도 딸이라 오냐오냐 하시는 게 내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속상하기도 하면서도, 그래도 아가씨 덕분에 내게 많이 유해지셨으니 다행스럽기도 하다. 항상 복잡미묘한 심경이 드는 것이 참 묘하다.
남편이 아가씨랑 여행 계획이며 뭐며 다 할테니 내게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둘이서 알아보겠지 하고 나는 진짜 신경을 안쓰고 여행 전날 먹을 간식이나 좀 챙겨서 여행을 따라 나섰다.
처음부터 모노레일 탑승 예약을 안해놔서 일정이 꼬이긴 했는데 나머지는 모두 순조로웠다. 들린 식당도 모두 맛있었고 좀 덥긴 했지만 식물원도 볼 만했고 바닷가 카페도 너무 멋졌다. 50만원이나 주고 잡은 숙소는 대식구가 들어가기에 충분히 넓었고 깨끗해서 만족스러웠다.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 터라 케잌에 맥주 한 캔씩을 하며 첫 날 마무리를 잘 하였다.
다음 날 아침, 휴대폰 시계를 확인하니 6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 밖이 시끌시끌 분주했다. 알고 보니 어머님께서 된장찌개에 감자볶음에 계란 말이까지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놀러와서 이게 무슨 상황?
간단히 먹자고 하셔서 햇반에 양념 불고기만 준비한 줄 알았는데 시끌벅적 난리가 났다.
나중에 듣고 보니 사위가 된장찌개를 좋아한다고 아침부터 사위 대접하시려고 분주하셨던 거였다.
내 첫 시댁 식구와의 여행은 계곡 나들이였는데 나는 그때 만삭이었다. 어머님께서 내게 모든 것을 준비해 오라고 하셨었다. 그리고 결혼 직후부터 내가 시댁에 가면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시댁에 계속 와 있으라고 하셔서 열흘을 지내다 온 적이 있었는데 미역국하고만 밥을 먹었었다. 새로운 반찬은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았었다. 내가 하길 바라신 건지...
아이를 둘 데리고 가도 늘 마찮가지였다. 먹을 것은 없었다. ㅠㅠ
그런데 사위를 보고 나서 180도 바뀌셨다. 집에 가면 먹을 것을 잔뜩 해놓으시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아, 여행와서 이 분주함은 뭐란 말인가!
현타가 왔다. 그리고 너무 너무 서운했다.
아가씨가 음식을 전혀 하지 않아 구박이라도 받을까봐 걱정이신건지 매번 전전긍긍 하시는 것 같다.
딸 생각하는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며느리 입장에서는 여간 서운한 것이 아니다. 내가 당한 서러움은 백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침밥은 맛있게 먹었다. 맛있다고 해주고 있는 것도 나 혼자였다. 나는 왜 그랬을까?
후다닥 치우고 둘째 날 여행도 시작했다.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가서 구경을 하고 나와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해수욕장에 들러 바닷물에 발도 담그고!
밤 운전이 힘들다는 고모부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헤어지고 시부모님은 우리 집으로 오셔서 일박을 더 하셨다.
또 한가지! 사위를 보기 전에는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주무시던 분이 사위가 들어오고 나서는 낮잠을 참으신다. 우리가 오랜만에 시댁에 가도 들어가 주무시느라 아이들이랑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으시고 우리는 진짜 초라하게 우리끼리 시댁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같이 여행을 가도 낮잠을 늘어지게 주무셔서 내가 진짜 왜 저러시나 생각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제는 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참으시는 거였다.
집에서도 그렇고 사위가 있으면 낮잠을 안 주무신다. 이게 또 왕 서운한 포인트였다.
주무시는 것 때문에 서운한 적이 너무 많았는데 나는 오든 말든 깨어있을 필요도 아무 대접 받을 필요가 없는존재란 말인가.
집에 7시쯤 도착했는데 오자마자 주무셨다.
장을 봐서 아침을 차려 드렸는데 예전부터 내가 한 음식에 맛있다는 말씀은 잘 안하신다.
오늘도 맛있게 드시는 것 같은데 맛있다는 말씀은 끝내 안하셨다.
밥상을 물리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하..
이야기를 오래 하면 안되는 이유가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게 서운한 것을 돌려 말씀하신다. 대놓고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 싫다.
10년을 당해왔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아이들 성장하는 모습 사진을 정리해서 다들 만들던데 너희는 왜 안만드냐고 하시기에 그게 뭐냐며 저는 그런 것을 잘 못한다고 말씀드렸다. 사실이기도 하고 이미 여러번 말씀하신 적이 있어 앨범을 만들어 드리기도 하고(물론 아이들 아기때 였지만) 액자도 주문해서 드리고 했었다.
그런데 또 그러시기에 그렇게 말씀 드렸더니 이모네 아들 며느리 이야기를 하시면서 00이가 장가를 잘갔다며 그 며느리가 그런 걸 잘한다며 애가 됐더라. 이러신다.
"어머님, 저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못 돼 먹은 며느리란 말씀이세요?"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그냥 웃기만 했다.
이 뿐이 아니라 필요한 걸 인터넷으로 아가씨가 많이 사준다면서 은근히 서운한 티를 내신다.
그런건 딸이 챙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아들한테 말씀하시면 아들이 사드릴 텐데요.
뭐가 필요한지 말씀도 안해주시곤 내게 서운하다 하시면?
그간 반찬통 세트, 옷, 캐리어 이런거 사드려도 택배 도착해도 연락도 없으시고 좋다 말도 없으시기에 내가 사주시는 건 싫으신 줄 알았죠.
하, 곱씹으니 화가 차오른다. 물론 그 앞에선 웃으면서 좋게 좋게 보내드렸다.
본인은 솔직하고 화통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받아들이는 나는 아니다.
어머님이랑 오래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끝이 좋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듣는 나 혼자서 말이다.
좋은 말 오가는 대화로 짧게 마무리하고 나는 만날 때 마다 그냥 내가 할 도리만 하면 될 것 같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그래도 남편의 어머니시고, 아이들의 할머니시니 서운함이 있어도 참고 내 할 도리를 해야겠다.
살갑지 않은 며느리라 죄송하지만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대해 드린 적이 많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서운함과 이 집에서 내가 제일 못한 인간이라는 확인 사살 뿐이다.
이제 시댁 식구가 편해졌다는 문장으로 시작한 글이 글을 쓰며 곱씹다 보니 분노 섞인 글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도착하셨는지 웃으며 전화해서 피곤하시겠어요. 푹 쉬세요~ 라고 말씀 드렸다.)
글을 쓰다가 분노가 차오르다가 가슴 속에서 폭발해 어느 정도 감정이 해소되는 것 같다.
이제 머릿 속에서 이런 생각들은 비우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