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세라 Nov 14. 2019

할머니의 외출

'끈적이지 않게 쿨하게' 관계 맺기

그날도 할머니는 토요일 오후 어김없이 우리 집에 오셨다. 평소 나와 내동생 선물을 자주 사 오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날 롤러스케이트를 사 오셨다는 것이다.

나와 내동생은 할머니 선물에 기분이 좋아 볼이 발그레져서 키득키득 웃으며 처음 보는 물건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할머니랑 엄마가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동안 나랑 내동생은 방에서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벽을 잡고 힘겹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균형을 잡는 것은 운동 감각이 없는 나에겐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동생이 내 옆에서 제법 균형을 잡고 타는 모습이 부러워 다시 일어나 넘어지고를 반복하며 롤러스케이트 타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얼마 간 집에서 연습을 했더니 제법 자세가 나왔고, 나랑 내동생은 집 앞 골목길로 나가 동네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생생 기분 좋게 달리면 볼을 스치는 바람이 내 몸을 둥둥 뛰우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 집에 오셨다. 오셔서는 하루 주무시고 다음날 일요일에는 당신 시누이 집에 들러 같이 교회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계신 큰아들 집이 아니라 또 다른 아들 집으로 말이다.
할머니는 요즘 말로 '졸혼'이라는 것을 하셨다. 그때가 벌써 30여 년 전이다. 시대를 앞서 가셨다.


할머니가 할아버지와 떨어져 지내는 명분은 일하는 며느리 집에 손자를 맡아 키우겠다는 것이었지만, 만약 일하는 며느리가 없었어도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으려 하셨을 것이다.

나는 그 바람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같은 공간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다.



할머니는 요즘 말로 '졸혼'이라는 것을 하셨다. 그때가 벌써 30여 년 전이다.



"엄마, 할머니는 왜 할아버지랑 따로 살아?" 
"할머니가 젊었을 때 할아버지가 정말 많이 속상하게 했대. 그래서 할머니는 늘 다짐했대. 내가 늙어서 저 인간하고 사나 봐라. 이렇게."
"할머니 많이 힘드셨구나.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나 봐."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인 건 아니고, 그냥 두 분이 안 맞으셨던 거야."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시면 엄마와 내내 식탁에서 음식 재료를 다듬거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당신 시어머니의 지독한 시집살이 이야기, 당신 남편이 경제적으로 낙제점이었다는 이야기, 당신이 시집에서 어린 시누이들을 업어 키웠다는 이야기, 그리고 우리 아빠 젊은 시절 지질했던 이야기에 엄마가 아빠 흉보면 같이 맞장구도 쳐가면서.
젊어서 부모를 여읜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잘 따랐다.
 
할머니는 졸혼만 하신 게 아니었다.
토요일마다 우리 집에 오시는 건 같이 사는 며느리가 집에 있는 주말에 며느리 쉬라고, 그리고 당신도 편한 우리 집으로 오셨던 거다. 굳이 시월드를 만들며 피곤한 일을 만들지 않으셨다.

또 평소 다니지 않던 교회를 늙어서야 다니시기 시작하셨던 것도 교회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니까, 당신이 돌아가시면 며느리들에게 제사 지내지 말라고 그러셨던 것이다.

할머니가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며느리들이 알아서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지만 며느리들의 죄책감도 덜어주시려 당신께서 교회를 나가셨다.

쿨하셨다.


할머니는 그 시절, 사회 관습이 말하는 남편에게 있어 아내가, 며느리에게 있어 시어머니가, 시누이에게 있어 올케가 아니셨다.
할머니는 같이 있으면 싸우기만 하는 남편과는 따로 사셨고, 같이 사는 워킹맘 며느리가 주말만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셨다. 그리고 시누이와는 자매지간처럼 같이 교회를 나가셨다.

 
30년이 지나 난 이제 나이만 먹은 어른이 되었다. 결혼도 했고, 회사를 다닌다. 가족생활에 사회생활에 내 주변의 관계는 점점 더 거미줄처럼 촘촘해진다. 낯가림이 내 정체성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닌, 관계 맺는 데 능력 미달인 나에게 이 거미줄은 여간 성가진 게 아니다.

가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 그저 나 혼자 세상 제일 구석에 콕 박혀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난 우리 할머니를 생각한다.
남편은 싫어했고, 시누이와는 자매 같았고, 아들과는 쿨했으며, 며느리와는 따뜻했던...
당신을 둘러싼 관계에서 항상 중심에 자신을 두었던 할머니.

관계를 개선 하기보다 불편함 관계를 피해버리는 방법을 선택한 할머니.
'끈적이지 않게 쿨하게' 

할머니가 알려준 관계 맺기를 생각한다.


난 아직도 할머니가 사다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비틀거릴 때처럼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다.
그 시절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고 일어서고 했던 것처럼 30대 후반을 사는 지금 나 역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

쌩쌩 달리던 그 롤러스케이트를 기억하며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한 잔에 굿모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