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만 남은 학교 앞 진아문구사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김장 김치를 받으러 택배가 아니라 직접 길을 떠난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일까. 남편이 내려가기 며칠 전부터 살짝 들떠 보인다. 집에 가져갈 이것저것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남편의 고향은 울산이다.
매번 내려오면 나를 데리고 울산 곳곳을 구경시켜준다.
‘서울촌놈’인 내가 이제는 울산 남구 삼산동, 동구, 학성고, 호수공원, 어린이대공원 등등 울산 명소나 지리를 제법 익혔다.
이번에는 산이다. 올라보니 산이라고 하기는 민망한 높이의 동네 야산이지만 높은 지형에 있어 정상에 서니 제법 보인다. 울산 곳곳이 다 보인다. 저 멀리 바다도 보이고, 울산을 둘러싼 산도 장관이다. 한반도 동남쪽에 위치해서인지 공장이 삐죽삐죽 많이 보이는 산업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미세먼지 하나 없는 하늘색이 예쁘다. 산 정상에 잠시 앉아 테이크아웃해서 가져온 커피를 마시니 이 또한 좋다. 차가운 몸이 따뜻하게 펴진다.
진아문구사는 어디 갔지?
"여기가 내가 나온 초등학교야. 정말 작다, 그때는 참 커 보였는데..."
산에서 내려와 예전 자신이 살던 동네를 구경시켜준다고 했다. 남편이 나왔다는 초등학교 주변으로 높은 아파트들이 즐비하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아파트다. 학교 앞으로 큰 도로가 잘 정비가 되어 있다.
"어? 진아문구사는 어디 갔지?"
남편이 초등학교 앞에서 서성거린다.
진아문구사.
나도 어릴 적 등굣길 그리고 하굣길, 학교 앞에서 오래 머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 준비물을 사려고 아이들이 북적대는 문구점에 들어가 아저씨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했던 기억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분식집 이름 ‘엄마손’ 떡볶이가 얼마나 맛있던지, 집에 오는 길 그냥 지나가지 못하고 꼭 그곳에 들러 떡볶이를 먹던 기억이다.
문구점 앞에 앉아 뽑기를 하는 남자아이들을 피해, 그리고 차를 피해 요리조리 걷던 기억이다.
요즘 다시 유행했던 달고나를 먹으려고 줄 서 있던 기억이다.
그 시절 학교 앞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빼곡히 들어찬 가게들을 두고 30미터도 되지 않는 학교 앞 거리를 빠져나오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어린아이 발걸음으로 두세 발자국도 못가 떡볶이가 있고 달고나가 있고 뽑기가 있는 다채로운 경험의 공간이었다.
꼬마 시절 쉽게 벗어나기 힘들었던 그 거리. 지금 다시 그곳에 간다면 여기가 이렇게 좁고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였나 새삼 느낄 것이다. 나를 더 이상 유혹하지 않는 것이니까 내 걸음을 멈추게 두지 않는다. 대신 그 추억은 기억에 진하게 남아서 한동안 맴돌다 가는 그런 곳이다.
그 ‘진아문구사’가 없어졌다.
그때를 떠올리며 미소라도 짓고 맴돌고 싶은 그 거리가 사라졌다.
“여기 있었는데? 다 없어졌네? 여기 있던 좁은 골목길도 다 아파트 단지가 되었구나.”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동네가 맞나 싶어 두리번 대지만 친구들과 문구점 앞에 쭈그리고 앉아 오락을 하던 ‘진아문구사’는 어디에도 없다. 꼭 한번 다시 가보고 싶었던 학교 앞 좁은 골목은 이제 사라지고 여기는 이제 얼마 전 새로 분양한 아파트 단지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그 높이에 압도되고 빨리 벗어나고 싶은 아파트 앞 큰 도로 말이다. 더 이상 기억 속 그곳이 아니다.
아마 어린 시절 경험이 한순간 모두 사라져 버린 기분일 것이다. 남편은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지 큰 아파트 단지 앞에서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옛날 그 골목길을 찾느라 분주하다. 빠르게 움직이는 남편의 발걸음만큼 큰 도로에 허망함이 짙게 베인다.
도시는 점점 골목이 사라지고 복도만 남는다는 유현준 교수의 말이 콕 박힌다.
걷고 싶은 거리는 대부분 성공적인 거리지만, 성공적인 거리라고 해서 반드시 걷고 싶은 거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걷고 싶은 거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휴먼스케일의 체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성공적이지만 걷고 싶지 않은 거리들은 대부분 휴먼 스케일 수준에서의 체험이 다양하게 제공되지 못한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현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
이곳은 안타깝게도 휴먼 스케일 수준을 벗어나버렸다.
학교 앞에서 일상을 경험했던 분식집, 문구점, 오락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학교와 아파트 단지가 마주 보고 있을 뿐이다. 걸어 다니는 길이라기보다는 차가 다니는 길이다. 이제 그곳은 사람의 걸음 속도가 아닌 차의 이동 속도로 채워질 것이다. 그만큼 체험할 수 있는 이벤트도 추억도 사라질 것이다.
한참을 그곳에서 길을 잃고 서성이다 지도 앱을 켜고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진아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