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세라 Dec 31. 2020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넷플릭스 집콕 프로젝트 - <8월의 크리스마스>


가끔 90년대 아날로그가 생각날 때가 있다. 사실 그때는 그 감성을 따라가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2020년 디지털 시대를 살며 그 시절의 아날로그를 쉽게 꺼내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이번 리뷰는 1998년 개봉되었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글이다. 갑자기 생각난 1990년대 영화를 2020년 넷플릭스로 본다.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시한부 남자가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을 했었다.”(정원의 첫 대사, 내레이션)


어머니를 일찍 잃었던 정원(한석규)은 어릴 적부터 늘 죽음을 생각해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순간에도 평소처럼 자신의 ‘초원 사진관’을 운영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 정원 앞에 다림(심은하)이 나타나면서 정원의 감정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정원은 다림과 점점 가까워지고, 다림은 정원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은근슬쩍 표현하지만, 정원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할 처지가 아니다. 자신이 처한 시한부의 상황도 말해주지 않고 그냥 평소대로 다람에게 다정하게 웃어줄 뿐이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 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정원의 마지막 대사, 내레이션)

정원은 다림이 자신을 기다리다 놓고 간 편지를 읽고 미소를 짓는다. 편지에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 정원에게 추억이 아닌 사랑을 간직하게 만들어 준 내용이지 않을까 상상할 뿐이다. 결국 영화는 스스로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정원의 모습으로 그의 죽음을 보여주며 마지막을 향한다.



슬픈 감정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시한부 이야기

<8월의 크리스마스>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평을 받고 한국 멜로 영화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건 신파로 흐를 수 있는 소재를 두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시한부 주인공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뻔한 소재를 뻔하지 않게 연출한 허진호 감독의 역량 덕이다.


허진호 감독은 <8월의 크리스마스>로 데뷔를 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한다. 이후 3년 뒤 <봄날은 간다>를 내놓고 한번 더 청룡영화상 작품상을 받는다. 허진호 감독을 ‘멜로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 바로 이 두 작품 모두 평범한 두 남녀의 평범한 사랑이야기를 평범하지 않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8월의 크리스마스>는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출 방식이었는데, 한 남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백하고 담담한 화법으로 이야기하며 세련된 연출을 보여준다. '죽음은 슬픔'이라는 통용된 공식 대신 삶과 죽음은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너무나 그리운 배우 심은하


<8월의 크리스마스>를 이야기할 때 감독의 연출만큼이나 회자되는 것이 '배우 심은하’다. 사실 심은하가 활동할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심은하라는 배우에 대해 잘 몰랐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보면서 왜 그토록 많은 감독과 관객들이 심은하를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 속 다림을 연기하며 풋풋한 첫사랑 감정을 매우 잘 소화해낸다. 새침한 듯 정원에게 거리를 두다가도 같이 놀이공원에 놀러 가자고 에둘러 호감을 표현하는가 하면, 비가 오는 날 우연히 만난 정원과 우산을 함께 쓴 장면에서는 부끄러운 소녀의 표정이 잘 나타난다.



허진호 감독은 이 장면을 찍었을 때 당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한 적이 있다. 이 장면을 망원렌즈로 찍었는데, 카메라 속에 비치는 심은하가 너무 예뻐서 중간에 컷을 하지 않고 최대한 길게 롱테이크로 찍었다고 한다. 실제 영화는 이 장면에서 심은하의 얼굴이 카메라에 크게 담길 때까지 계속 걸어오는 장면을 끝까지 담는다. 나만 여기서 심은하의 매력을 느낀 게 아닌가 보다.


이 외에도 배우 심은하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명장면을 많이 만들었다. 몸이 안 좋아져 갑자기 입원을 한 정원,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다림이 정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국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다림은 사진관 유리를 향해 돌을 던진다. 깨진 유리창으로 보이는 심은하의 얼굴에서 그리움과 기다림, 원망이라는 복합된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또 시간이 흘러 사진관을 다시 찾은 다림의 마지막 장면은 역시 심은하이기에 가능한 연기라 보는 장면인데, 첫사랑을 추억하듯 수줍게 웃는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성의 모습이 잘 담겨있다. 이 영화는 심은하가 왜 ‘정치인의 아내’보다 ‘배우’라는 타이틀이 더 어울리는지 잘 설명해준다.



삶의  다른 이름 죽음,
죽음의  다른 이름 


<8월의 크리스마스>는 긴 호흡으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안에서 생긴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 영화의 소재가 지루하고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큰 볼거리도 엄청난 스토리도 없는 잔잔한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추억되는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삶에 대한 고찰이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초원 사진관’에 걸려 있던 다림의 사진처럼 삶은 결국 시간이 지나 추억이 되고, 죽음은 결국 정원의 첫 번째 내레이션처럼 자신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언젠가는 올 사라짐이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삶과 죽음’은 결국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제목처럼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일상의 단편으로 긴 여운을 남기며 영화는 끝이 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부가 찍어내는 화폐, 정부도 우리처럼 도둑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