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한라봉 더 달기 전에 새콤할 때 먹어요
한라봉을 누가 먹는다고 샀어?
이번 설을 앞두고 어른들께 드릴 설 선물을 샀다. 마침 친구가 제주도로 귀촌한 부모님이 직접 재배를 했다며 한라봉이 필요하면 말을 하라고 한다. 하우스 한라봉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은근 홍보도 잘한다. 마침 설 선물을 고민하기 싫었던 참에 잘됐다 싶어서 냉큼 두 개를 주문했다. 하나는 시부모님 댁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친정 부모님 댁으로 향할 것이다. 매번 명절 선물을 뭘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데 이번엔 친구 덕에 의외로 쉽게 해결했다. 가뿐한 마음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다음 주쯤에 한라봉이 갈 거야. 이번 설에...”
“아니, 나는 당뇨가 있어서 못 먹고, 아빠는 셔서 못 먹는데 한라봉을 누가 먹는다고 샀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내가 차마 생각을 못했다. 엄마는 최근 당뇨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먹고 싶은 거 참아야 하니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아빠는 옛날부터 귤이 시다고 먹지 않았다. 친구의 감언이설에 내가 넘어가서 그랬을까, 아니면 설 선물을 고민하기 싫어서 그랬을까 나는 뭐에 홀린 듯 아무 생각 없이 친정집으로 한라봉을 보내고 만 것이다.
한라봉은 시어머니가 좋아하는 과일이라 가끔 설 선물로 보내드리던 품목이다. 친정에는 그보다는 현금을 드리곤 했다. 서울 분인 우리 엄마는 물건보다 현금을 더 선호한다. 경상도 분인 우리 시어머니는 현금은 둘째치고 물건도 드리려면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니 택배로 대신 물건을 보내는 게 가장 쉽게 드리는 방법이다.(흔히 알려진 지역 문화와 마침 거기에 맞아떨어지는 두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이니 이에 대한 깊은 해석은 없으시길.) 이번 설에 친구의 ‘한라봉 영업’ 연락을 받고 나는 망설임 없이 시댁 주소를 불러줬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났다. 내가 엄마한테 너무 소홀한가 싶어 하나 더 엄마 앞으로 주문한 것이다. 아, 엄마는 현금을 더 좋아하는데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안 먹으면 잘 보관해 둬, 내가 가져가지 뭐!
맞다. 내가 실수를 한 게 맞다. 한데 딱 0.1초만 내 실수에 놀라 당황했을 뿐, 이내 서운한 감정에 내 얼굴은 달달 달궈지기 시작했다. 시어머니만 사드리기에 갑자기 죄책감이 들어 기껏 엄마 생각해 사드린 건데 그래도 한 번은 빗말이라도 “아이고, 뭘 그런 걸 다.”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아니, 내가 원래 알고는 있지만, 엄마 왜 이렇게 솔직해?
내 실수에 대한 당황, 못내 엄마가 너무한 것 같은 서운함에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을 더듬자 옆에서 아빠가 끼어든다.
“아니, 엄마는 말이야, 그게 있잖어. 너 괜히 돈 쓸까 봐 그러지.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아빠, 이미 늦었어요. 엄마는 당신 못 먹는 한라봉을 왜 샀냐고 짜증 부리고 있는 거잖아요. 옆에 아빠가 중재를 해줘서 다행이지 아니면 오랜만에 엄마랑 한판 할 뻔했다. 아빠 말에 엄마도 할 말을 잃었다. 애써 신경 써 준 딸한테 자기도 모르게 짜증을 냈으니 민망하고 미안한지 엄마도 나 따라 어버버 댄다.
이 전화 통화의 결말? 엄마와 나는 둘 다 스스로 한 실수에 놀라 계속 어버버 대고 그 무음의 무한한 허공에 대고 아빠의 외침이 채워지며 그렇게 끝났다.
“한라봉 잘 먹을게. 고맙다, 고마워. 우리 딸 고마워!”
전화 통화를 끊고 내내 집중이 안 된다. 너무 기분이 나쁘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는 이해하고 알겠는데,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엄마가 밉다!
“안 먹으면 잘 보관해 둬, 내가 가져갈게!”
기어이 엄마에게 카톡을 보낸다.
못났다, 못났어.
엄마, 당뇨 걱정되면 더 달기 전에 새콤할 때 먹어봐
뇌는 부정적인 신호에 더 민감하다고 한다. 부정적인 기억이 긍정적인 기억보다 더 오래 그리고 깊이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진화의 산물로 부정적인 경험에 더 잘 반응해야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던 것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에 더 휘청대곤 한다. 상대와 백 번 좋은 추억을 쌓아도 끝내 한 번의 안 좋은 추억으로 관계가 흔들리고 훗날에도 그 한 번의 나쁜 기억만 머리에 더 남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결혼 후 엄마와 떨어져 살면서 엄마가 늘 보고 싶고 감사하고 애틋했던 감정이 몇 년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라봉 사건’이 모든 것을 망치고 만 것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전화하던 엄마한테 이젠 전화하기도 싫다. 흥칫뿡이다.
이틀 뒤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안 하던 존댓말까지 써가며 나에게 친근함을 표시한다.
“한라봉 잘 받았어요. 잘 먹을게.”
나는 엄마에게 삐친 것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써 카톡으로 답을 했는데 그게 다소 사무적이었나 보다. 티가 났는지 엄마에게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우리 둘, 애써 쿨한 척 언제 서운했었냐는 듯 안 그런 척해본다.
“어, 그게! 서늘한 데 두면 3월까지 보관이 되고, 어, 그게! 점점 단맛이 많아진대.”
“어, 그래그래. 한라봉이 많이 들었더라. 어, 그래그래. 좋더라.”
서운한 적 없는 척, 그래도 어색하게 언제 밥 먹으러 오라며, 한 번 가겠다며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여느 대화와 똑같이. 다소 감정을 숨기느라 긴장한 말투만 빼면 말이다.
뇌과학자들은 뇌가 부정적인 것에 민감한 만큼 일부러 행복하고 긍정적인 상상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다 보면 뇌는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정말로 행복하다고 착각을 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부정적인 기억도 끝내는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지속해야 하는 관계 속에서 이 조언은 더 빛나 보인다.
“엄마 당뇨 걱정되면 지금이 새콤하다니 지금 먹어봐. 점점 달아진다잖어.”
엄마에게 카톡을 보낸다.
잘났다, 잘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