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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선 Feb 26. 2024

<더 글로리>, 열두 살 내 짝의 글로리

학교폭력 복수극을 다룬 드라마가 화제였다. 예고편의 폭력 장면에 거부감이 일어 외면하다가 줄거리가 못내 궁금해 주요 장면을 뛰어넘듯 본 것이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더 글로리>를 다시 봤을 때는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새겨지며 울고 쓰게 웃었다.

극 중 가해자 패거리는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 급우 중 사회적 약자를 골라 모멸감을 주며 화장실 청소 당번을 대신 시키더니 급기야는 성폭력에 고데기와 다리미로 몸을 지진다. 경찰서에 불려 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모가 해결해 주고 담임도 한편인 듯 방조한다. 피해자 중 하나였던 문동은(송혜교 분)은 복수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십수 년 후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 8살 딸의 담임선생이 된다. 이를 알게 된 박연진이 교실을 찾아와 문동은에게 쌍욕을 하며 화를 내자 문동은이 이런 말을 한다.

“네가 그대로라 얼마나 다행인지.”


이 대사를 듣고 문득 떠올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 6학년, 당시는 책상 하나를 짝과 같이 썼는데, 책상의 반을 가르는 줄을 그어 놓고 금을 넘어왔다며 신경질을 내는 아이였다. 자리는 곧잘 시끄러워졌다. 한번은 앞자리의 아이들과 모둠회의 후 발표자를 정하는데, 그 아이는 내가 여자라서 발표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어찌나 단호한지 다른 두 아이도 어리벙벙히 쳐다만 볼 뿐. 담임교사가 검사하는 일기장에 그 일을 적어 내기도 했고, 짝을 바꿔 달라고 요청도 해봤지만,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린애들끼리 귀엽다는 정도로 보는 담임의 태도가 기억난다. 누군가의 중재나 위로도 한번 받지 못한 채, 매사 냉소적인 표정으로 비아냥대던 짝의 말투가 내 귓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다른 아이들과는 잘 지내는 듯했던 그 아이가 왜 나에게만 그렇게 못되게 군 것인지 난 십수 년을 궁금해하며 살았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난다고, 우리 자리의 소란은 그 아이 탓만은 아니다. 동창들에게 나중에 듣게 된 내가 기억 못하던 일은 그 아이와 내가 크게 싸운 날 그 아이에게서 피가 났다고 했다. 그리고 동창 중 한 명은 그 아이가 누군가와 싸워 울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누가 울리고 누가 피를 냈겠는가. 아마 나였거나 나 같은 아이였을 것이다. 그간 나는 날 툭툭 건드리거나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장난을 거는 남자아이들에게 후하게 복수를 해왔다. 관심의 표현이 그런 장난이 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6학년 짝은 장난을 거는 정도에 그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의 날카로운 말투가 나는 늘 거슬렸고 되받아치듯 쏘아붙여야 직성이 풀렸다. 똑같은 폭력으로 응하던 내가 홀가분해졌을리는 없었다. 정도의 차이에 비교는 무리지만,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기나긴 복수에 성공한 후 자살을 선택하려는 마음을 알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열두 살 짝과의 불편한 관계의 이유는 나의 모난 성격이라 여겨왔다. 그걸 둥글게 하고 싶어 무던히 애써왔다. 이제 와서 그 이유를 그저 ‘정신적 폭력’을 받았다고 여기니 어쩐지 큰 짐을 하나 덜어낸 기분이 든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게 하는 것이 강제 짝 배치의 교육적 이유였다면 감히 실패한 교육이라 말하련다. 사람을 포용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사람은 왜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까 하는 궁금증만을 갖게 해주었으니까. 그 고통은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았다.





졸업 후에도 종종 어울리는 6학년 동창들이 있었다. 이십 대 중후반이 된 우리들의 모임에서 누군가 내 못된 짝이었던 P의 근황을 전했다. 명문대를 나왔고 키가 아주 커졌는데 요즘 말로 ‘훈남’이 되었다고. 얼마 뒤 P가 처음으로 동창 모임에 나온 날, ‘너희 둘이 맨날 시끄러웠잖아’라며 때늦은 교실 불만이 쏟아졌고, 연락처를 주고받고 날을 잡아 둘이 만나게 되었다. P는 정말로 ‘훈남’이 되어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스펙뿐 아니라, 성격이 훈훈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신물이 나게 보았던 표독스럽고 신경질적인 어떤 기운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훌쩍 큰 키에 작은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누가 봐도 괜찮은 아이가 있었다. P는 내가 그동안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 착해 보였다.
내가 그 앨 따로 만난 이유는 어릴 때 내게 한 행동의 이유를 듣기 위해서였다. 사과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완전히 달라진 P는 마치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양, 나에게 못되게 군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되려 하는 말은, 주변 사람들이 자기 진심을 몰라주고 오해한다며 힘들다고 했다.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마음을 오랫동안 키워왔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나쁘게 대한 마지막 사람인 걸까? 기억에서 지워질 만큼 하찮았던 걸까? 난 그토록 오랫동안 기억하며 힘들어했는데.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받을 사과는 없었다. 자신이 정말 그랬느냐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P의 태도가 의뭉스럽기도 했지만, 순하게 바뀐 P의 얼굴을 보며 실체가 없는 것에 오랫동안 속상해한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변할 수 있구나, 억울해하며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가해자들은 십 수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누군가를 가해하며 산다. 약한 이에게 함부로 대하고 마땅히 보살펴야 할 이를 이용하고 버린다. 피해자 문동은은 사람들이 변치 않고 그대로인 것에 다행스러워하며 복수를 하나하나 이루어 간다. 그들이 개과천선했다면 복수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리라. 아니 가능하지도 못했으리라.
나의 개과천선은 명상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속세를 떠나 묵은 때를 벗겨내며 큰 목적에 헌신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이제 그 시절이 지나 갔다. 그립지만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용기로 내 삶을 산다. 한편 그 시절의 깨우침을 삶에 적용하려니 그야말로 좌충우돌이다. 환경에 절망, 후진 내게 실망. 과거의 내가 부메랑처럼 돌아와 현재의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질풍노도의 사십 대를 지나는 내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타인에게 나쁘게 굴 때 그 당사자의 마음도 결코 좋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을 본떠서 완벽한 인공지능을 만든다 해도, 인간의 밝은 마음, ‘양심’을 흉내 낼 수 있을까?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지 않을까봐 겁나서 착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인간의 본성이 밝다는 깨우침은 져버릴 수 없는 믿음이다. 그래서 내 안에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며 지금을 견딘다.






열두 살 P의 마음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었을까? 날 미워하고 괴롭히고 싶던 마음은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아팠을 그 마음은 지금 괜찮아진 걸까? 사람들의 오해와 질투에서 자유로워졌을지. 부메랑처럼 돌아온 상처가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혹시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는지도 포함해서…. 깊어진 눈과 달라진 질문 속에서, 잃어버렸던 나의 조각을 열두 살 P에게서 발견하고 싶다. 그때도 밝게 빛나고 싶던 그 마음을 소중히 되찾아 오고 싶다. 그러면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그대로가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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