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똥말똥하다가 붓을 잡아버렸다
말똥말똥, 나의 새벽이었다.
- 다시 붓을 잡기까지
금요일, 토요일 밤엔 웬만하면 안 잔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이것저것 하다 보면 새벽 되고,
그제야 겨우 잠든다.
특별히 생산적인 걸 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일찍 자고 싶진 않다.
이 심리는 토요일까지 이어진다.
오늘은 내가 토요일 새벽에 뭘 했는지 써보려고 한다.
일주일 전에 쿠팡에서 미술 도구를 샀다.
예전 10대 때 입시 미술 할 때는
화방에 가서 도구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곤 했는데,
요즘은 그냥 쿠팡에서 클릭 몇 번이면 된다.
‘가볍게 그릴 거니까’
크게 고민 없이 빨리 도착하는 걸로 골랐다.
미니 팔레트, 작은 붓들, 정체를 알 수 없는 펄 들어간 물감들까지.
세상 진짜 좋아졌다.
단품으로 파는 물감도 있길래
앞으로 자주 쓸 것 같은 오페라 색도 하나 샀다.
배송은 다음 날 바로 왔다.
근데 역시나 바빠서 열어보지도 않고
며칠 동안 그냥 방치.
그러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드디어 물감 개시.
사실 오전에 그림 그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근데 밀린 OTT 좀 보고,
굳이 청소한다고 방도 정리하고,
결국 새벽에야 워밍업 삼아 붓을 들었다.
시험 기간에 괜히 책상 정리부터 하던 그 느낌 그대로였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스스로 너무 강박적으로 굴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야만 해’, ‘잘해야 해’ 이런 생각 좀 내려놓자 싶었다.
이번엔 아이패드 말고,
진짜 종이랑 붓, 물감으로 오랜만에 만다희를 그려봤다.
묘한 기분이었다.
종이에 그려보는 게 진짜 얼마만인지.
물감 쓰는 것도 정말 오랜만.
2~3년 전쯤, 코로나 기간에 한 학기 정도 민화를 배운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손 놓고 안 그렸다.
그때는 ‘당분간 디지털에 집중해보자’ 했는데,
어쩌다 다시 종이로 돌아오게 됐다.
손을 놓은 지 3년.
지금은 다시 낙서처럼,
가볍게 시작하고 있다.
그게 너무 감사하다.
아직 손이 잘 따라주진 않는다.
머리랑 손이 따로 노는 느낌.
가끔은 ‘이 정도면 됐지’ 하면서 타협도 한다.
근데 다시 보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도 같다.
이런 걸 느끼게 해준 게
토요일 새벽.
말똥말똥한 이 시간에
나만의 세계가 열린다.
그리고 확실해졌다.
나는 새벽형 인간이었다.
출근은 아침인데
그래서 평일에는 잘 안 하게 되는 거겠지.
그래도 괜찮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시간이 있는 거고,
나는 새벽이 그 시간이었다.
새벽형 인간, 그게 바로 나다.
월요일이 와도 말똥말똥 모드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