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멜라스 속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는 삶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감상한 영화입니다
영화 영주의 줄거리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가장이 된 영주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영주는 이제 갓 성인을 앞두고 있는 19살의 아이이며 친척의 도움 없이 동생과 함께 세상을 이고 나가야 한다.
영주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동생의 학비를 위해 알바를 할 뿐이다. 19살에 부모님의 제사를 올리기에는 아직 너무 여리고 어리다.
그러다 동생이 사고를 저질러 300만원의 합의금을 부담해야 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영주는 억하심정으로 부모를 다 세상에 떠나보낸 가해자에게 간다. 어쩌면 영주의 고통을 가해자 그들이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심리로 찾아갔을 것이고 그들에게 엄청난 원망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모두 그들 때문이니까.
하지만 영주가 가까이에서 본 가해자들은 생각과는 달랐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책속에 고통스럽게 살고있었고,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며 무엇보다도 영주에게 듬뿍 애정을 주었다. 마치 엄마처럼 떡볶이를 먹고 있는 영주의 머리를 묶어주기도 하고, 예쁜 옷을 사주기도 한다.
과연 영주에게 위로가 될 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먼저 떠나버린 부모
마치 진짜 부모인 것처럼 애정을 주었던 가해자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지만 사건을 일으킨 동생
영주가 필요한 건 주체가 누군지가 아니라 그냥 따뜻한 위로와 사랑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꿋꿋이 버텨내고 있다고 해도 가장 필요한 건 역시 누군가의 사랑이었기에. 영주가 부모님을 죽인 가해자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영주를 마냥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대가없이 나에게 돌아오는 사랑은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고 그런 사랑을 항상 나에게 주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나의 부모님이다. 그런 부모님의 사랑이 없어진 세상속에서 아직까지 19살인 영주는 조금 위태로워 보인다.
영화 맨 마지막에 결국에는 가해자의 부모도 영주를 밀어내고 있음을 알게되고, 영주는 한강다리에서 본인의 몸을 기울여본다. 결국에는 아직 세상에는 본인이 지고 나가야 할 짐이 많기에 몸을 던지진 못한다. 영주에게는 본인에게 주어진 잠깐의 애정을 누릴 권리는 주어지지도 않았던 것이다. 영화 끝은 다시 영주가 한강대교에서 내려와 걸어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왜 청춘은 아파야 하는가? 왜 영주는 그 어디에서도 사랑받지 못하는 회색지대의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른이 되려면, 아픔을 견디고 그래야 성숙해 진다는 말. 아프지 않고는 어른이 될 수 없는 걸까? 사랑만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인지, 왜 우리는 영주에게 아픈 현실을 감내하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건지 고민해보게 되는 영화였다.
영화의 여운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내가 타인과 너무 단절된 삶을 살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영화였다. 우리가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 그 속에 희생된 아이들에 대해 얼마나 편협한 프레임으로 바라봤는가를 되새겨 보게 되었다. 편협한 프레임으로 바라보면서 우리가 놓쳤던 것에는 그들의 개인적인 서사가 있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격변이 있다. 그들을 그냥 하나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로 바라보고 어느 하나가 희생된 관계라고 보기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겪는 고통이 너무나도 아파보였다.
가해자의 아픔을 보듬어야 한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어찌됐건 범죄를 저지른 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며 그들의 개인적 사정이 법의 판단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가해자 중에서는 다수자, 힘이 있는 자들에게서 배제된 소수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사회의 폭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가해를 저지르게 된 서사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가해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가해자도 역시 소수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고 배웠고, 우리는 소수자를 위해 발을 맞춰야 한다. 원래 세상은 그런거야! 라며 치부하기에 우리가 놓치고 가는 소수자의 고통이 너무나도 아프다.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으로 우리가 세상의 온갖 역설과 모순들에서 시선을 뗄 수 있게 되었다면, 우리의 행복은 거짓된 것이 아닐까.
우린 '영주'와 같은 아이가 세상에 있음을 알고 있다. 또 어쩌면 나는 '영주'에 비하면 굉장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또 영화를 보고나서 '불편함'을 느꼈음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미처 놓치고 있었던 현실의 추악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밤이 찾아오면 그들은 마을의 한 길을 따라, 창문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들 사이를 지나, 들판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 간다. 그렇게 그들은 혼자서 서쪽으로, 아니면 산맥을 향해 북쪽으로 간다. 그들은 계속 걸어간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그곳을 결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_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어슐러 르권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이라는 책이 있다. 오멜라스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지만 낙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한 명의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희생에 부당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딘가로 향한다. 책에서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있다' 라고 적어놓았다.
소수의 희생에 부당함을 느꼈다면,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소수자들에게 가해진 피해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하고 있었던 폭력을 거둬야 한다는 것. 자그마한 실천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발걸음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자를 위해 함께 걷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그러기에 실현하기도 어렵지만, 방향성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부분이다.
영화 '영주' 처럼 계속해서 소수자를 위한 영화가 나오고, 그로 인해 관객들이 새롭게 얻어갈 수 있었던 깨달음 있다면 그것또한 오멜라스를 떠나는 발자국이다.
굉장히 현실적이었고 배우 김향기의 진중한 눈빛연기가 영화의 몰입감을 더해, 많은 여운을 남겼던 영화였다. 오랜만에 생각을 환기시키고 평소 놓쳤던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