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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1. 2017

#02, 순례여행 둘째날, 벌써 8분의 1을 마치다

시코쿠영장 88중 11번까지, 근데 거리로는? (for #6~#11)

(for #1~#5)

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살짝 흐림


5.3km - ⑥安楽寺(Anrakuji) - 1km - ⑦十楽寺(Jūrakuji) - 4.2km - ⑧熊谷寺(Kumadaniji) - 2.4km - ⑨法輪寺(Hōrinji) - 3.8km - ⑩切幡寺(Kirihataji) - 9.8km - ⑪藤井寺(Fujiidera)


30km 걷고, 사발라면에 맥주 들이키곤 기절모드에 빠지다


둘째날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순례여행이 시작되는 날, 핸폰 알람을 5시에 맞춰놨는데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아침식사를 5시반부터 준비해 준다고 했으니 느긋함도 잠시, 아침이라 물세안만 간단히 하고 제일 중요한 선크림을 비롯해서 베이스커버까지 자외선이 차단되도록 꼼꼼하게 화장을 한다.

조식은 저녁보다는 간단하게 밥, 된장국, 연두부, 어묵, 이름을 모르겠는 해조류, 우메보시 한알, 단호박 두점, 그리고 공포의 낫또와 날계란에 김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비닐포장된 노리 두세장이 전부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일본 가정식 아침식사 같다.

먹는 걸 가리지 않아도 낫또만은 날계란만은 친해질 수가 없는 데 첫날부터 대면하고 말았다.

어찌어찌 시도는 해보았으나 도저히 삼킬 수가 없어서 결국은 포기하고 나머지 것들만 깨끗하게 비웠다.


보조가방으로 크로스백을 가져올까 하다가 카메라를 넣어 다닐지도 모르겠기에 소형배낭을 가져왔는데 큰 배낭에 넣어보니 바늘 하나 꽂을 틈도 없이 꽉차고 만다. 그렇다고 앞뒤로 메고 다닐 수 도 없으니 역시나 크로스백을 가져왔어야 하는 거였다. 다음 절에서 납경책, 지도책을 넣을 수 있는 순례자용 크로스백을 하나 사기로 하고 소형배낭은 주인 할머니께 부탁해서 버려달라고 한다. 몇년동안 잘 메고 다니다 어깨끈도 튼실하게 수선해서 들고 온 노스페이스 백팩과의 이별이다. 모든 이별은 아프지만 여행을 힘들게 하는 것들은 아낌없이 버려 주련다.




6시반에 숙소를 나선다.

6번 안라쿠지까지는 5km가 넘는 거리다. 아침이라 쌩쌩하니 한시간이면 족하겠다.

잠시 후면 안라쿠지에 다다르겠다 싶은 거리를 남겨둔 시점에 1차선 도로를 걷고 있는데 초등학생들의 등교 모습이 시선을 끈다. 아직 7시 반이라 아무리 일본의 아침이 조금 더 빠르다 한들 초등학생이 등교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게다가 깃대를 든 고학년 남학생이 앞에서 인솔하고 고학년 여학생이 맨 뒤를 맡아서 뒤쳐지는 저학년생이 없게 차로로 들어가지 않도록도 지도하면서 등교하는 모습이라니. 띄엄띄엄 민가에서 나온 아이가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단정하게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가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지도책을 살펴보니 안라쿠지 못미쳐서 마츠시마초등학교가 있는데 아마도 그 학교로 등교를 하는 중일게다.

한국에선 멀리 가지 않고 조카를 예로 들어 보더라도 올해로 4학년을 마치고 곧 5학년이 될텐데 8시나 되어야 겨우 일어나서 아침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이 덜깬 얼굴로 8시반이 넘어야 집을 나선다. 걸어도 10분 이내일 거리를 단 한번도 걸어가지 않고 자전거를 대동하고서.

물론 일본에서도 도회지의 아이들은 등교하는 모습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모습이 일본이어서 짜증이 올라오는 걸 참을 수 없다.


안라쿠지(安楽寺) 본당 앞 석비에는 시코쿠 영장 제8번 溫泉山 安樂寺라고 씌여 있다.

지도책을 보니 옛날 이 땅에 온천이 있어 탕치(온천으로 병을 고친다)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코보대사가 약사여래를 조각하여 제 6번 영지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33체의 불상과 사냥꾼이 잘못 쏜 화살을 수행중인 대사를 대신하여 받은 작은 소나무인 역송이 있다고 한다. 역시나 소나무는 이쁘게 가꿔져 있다. 때로는 너무 인공적으로 느껴져서 싫증나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다.




7번 쥬라쿠지는 안라쿠지에서 불과 1km 떨어져 있다.

오헨로미치에 코스모스가 활짝 만개해 있다. 어제부터 만난 순례자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 스쳐지나가거나 잠시 같이 걷기도 하는데 만날 때마다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라거나 '곤니찌와'라고 서로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이방인인 나로서는 오하이오 고자이마스와 곤니찌와의 경계가 좀 애매하다. 아니 그건 일본인도 마찬가지 인 듯, 비슷한 시간대에 어떤 일본인은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라고 인사하고 또 다른 일본인은 곤니찌와라고 하기도 한다.

오헨로상의 아침은 특히나 일찍 시작되니까 9시까지만 오하이오 고자이마스라고 할까 하다가 내 맘대로 10시까지는 오하이오 고자이마스, 그 이후는 곤니찌와로 정해 버린다. 그러고 보니 곰방와는 몇시부터로 하지.


쥬라쿠지(十楽寺), 열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책에는 코보대사가 인간이 가진 여덟의 고난을 넘어 열의 즐거움(극락정토에 있는 10종의 쾌락)을 얻을 수 있도록 절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쥬라쿠지의 주차장에 오헨로상의 스티커를 붙인 귀여운 소형차가 주차되어 있다. 자동차 순례를 하는 차량인 듯 하다. 시코쿠에 와서 보니 의외로 걷는 오헨로상보다 자가용이나 단체버스로 하는 순례자들이 많다. 그리고 짧게 나눠서 도는 순례자들도 많다. 오늘은 도쿄에서 온 50세 전후의 여성과 같이 걷는다. 배낭도 가볍게, 신발은 운동화가 아닌 단화를 신었다. 물어보니 3박4일간만 걷고 돌아간단다. 휴가나 주말을 이용해서 계속 나눠 걸을거라고.




8번 쿠마다니지까지는 4.2km 한시간 거리다.

절의 입구에는 한참을 비석길이 이어진다. 자세히 살펴보면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져 있는 듯하다. 절이 엄청난 부자란 소리일 것이다. 일본의 사찰은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걸로 알고 있는 데 문득 그 재산의 규모가 궁금해진다.

본당은 비석길을 걸어 산문을 지나고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데 이제까지 본 8개의 사찰 중에서는 비교적 절다운 모습이다. 쿠마디니지(熊谷寺)의 안쪽에 있던 골짜기에서 수행을 하고 있던 코보대사가 등신대(等身大)의 천수관음보살을 새기고 그 태내에 작은 금의 관음상을 납입해 열었다고 전해진다는 데 불교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




9번 호린지까지는 2.4km로 비교적 짧은 거리다. 일찍 나선 탓에 아직 오전 10시밖에 안 되었다.

오늘은 좀 부지런히 걷는다. 초반부라 무리하지 않고 10번 기리하타지까지만 마칠까 생각했었는데 다음 일정을 살펴보니 12번 쇼산지가 완전 등산코스, 헨로 고로가시라고 한다. 고로가시(転がし)는 구르다의 명사형이다. 우리 말로 표현하면 아마도 깔딱고개가 아닌가 싶은데 그런 게 6군데나 있는 13km 구간이라니 하산까지 생각하면 아침 일찍부터 시작해야 오를 수 있을 터, 오늘 11번 후지이데라까지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제는 10번 기리하타지부터 11번 후지이데라까지가 거의 10km이고 힘이 빠진 오후 시간이라 걷는 속도가 현격히 떨어질테니 오전에 많이 걸어두는 수 밖에 없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오늘 6개의 절 26.5km를 걸어야 하고, 절마다 2~30분씩은 경내에 머물테니 그 두세시간을 제외하면 걷는 시간은 7시간 정도여서 마음만 바빠진다.


호린지(法輪寺)는 코보대사가 부근의 골짜기에 불교도를 지키는 흰 뱀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석가 여래를 만들어 열었다는 절로 시코쿠 88개소 중에서 유일하게 본존불이 열반에 든 석가의 모습이라고 한다.




10번 절 기리하타지까지는 3.8km 천천히 걸어도 한시간이면 족한 거리다.

아직 정오도 안된 시간이니 기리하타지까지 마치면 1시쯤일테고 그 때 간단히 요기라도 하기로 하고 다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갈 길이 멀어 카메라를 꺼내는 횟수도 줄어든다.

순례길이라고 해서 대부분 흙길이겠거니 했는데 와서보니 쭉 포장도로다. 배낭이 무거운 것 외에 아직 발은 괜찮지만 이대로 계속 포장도로를 걷다보면 발도 아파올게다.


기리하타지 산문에 다다라서야 아뿔싸, 이 절에 공포의 333계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떠나오기 전의 사전 정보조사에서 확인하고 기리하타지에 오르기 전에는 꼭 배낭을 아랫마을 상점에 맡겨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그걸 깜박하고 올라와 버린거다. 이미 조금 힘이 빠진 상태라 어깨를 짓눌러 오는 배낭을 메고 333계단을 오르기는 정말 자신이 없어서 배낭 맡길 곳을 찾았으나 333계단 아래서는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고민끝에 다시 내려가서 가게에 맡기기로 한다. 1km 가까이를 올라왔는 데 슬프고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6번까지라도 걸었어야 하는데 후회해본 들 무슨 소용이랴.

다행이 내려간 상점에서는 배낭을 맡아준다. 다시 오르는 길, 포장은 되어있지만 완만한 산길이다. 중간에 도쿠시마고속도로가 터널로 산 아래를 지나간다.

333계단을 정신없이 올랐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개탄스러워서 절도 중요문화재라는 切幡寺大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지쳐서 배낭을 맡긴 상점으로 다시 갔다.

뒤늦게 한국인인 걸 알고는 오늘 오전에도 한국인 한 명이 지나갔다고 한다.

오늘이 이틀째인 데 한국인이 아주 없지는 않나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상점에 들어간 김에 오늘 숙소를 문의했다. 후지이데라 근처에 싸고 깨끗한 숙소가 없냐고 물으니 어려운 질문이란다. 그러고는 두세군데 전화를 돌린다. 한 곳에서는 영업을 안한다고 하고, 한 곳에선 예약이 가능한데 저녁이랑 아침식사 포함하면 6500엔이고 저녁을 제외하면 5500엔이란다. 어제 잘 먹었으니 오늘은 편의점식으로 때워볼까 하고 5500엔으로 기리하타지 아래 요시노료칸에 예약을 했다.




숙소는 정했으나 후지이데라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다. 기리하타지에서 오르막길을 2km는 더 걸으면서 힘이 쫙 빠진터라 밥 생각도 안난다. 계속 물만 고프다.

실제로 걸어보니 10km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남쪽으로 쭉 드문드문 농가가 있고, 밭이 있는 길을 한없이 걷는다. 코스모스 밭도 지나지만 빛도 없고 카메라 꺼낼 힘도 없어서 핸드폰으로 몇 컷만 담아본다. 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오헨로상도 보이지 않는 길을 간간이 구글맵에 의지하면서 걷는 데 발이 너무 아파서 자주 쉬게 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을 걷는데 끝나지 않을 것 같이 까마득한 다리를 만난다. 넓지 않은 긴 다리를 자동차가 쌩쌩 지나는 다리를 위태롭게 건넌다. 다리 아래 요시노강에 세월을 낚는 강태공이 있다. 낚시를 드리운 건 부럽지 않은 데 저리도 유유자적한 삶은 참 부럽다.

다리(川島橋라고 적혀 있는 걸 보니 카와지마하시라고 읽을까)를 건너면 후지이데라가 지척일 줄 알았는 데 헤맨 것 포함해서 한시간 반을 더 걸어서야 도착한다. 시간은 4시 반이다. 10km를 3시간 반 걸려서 걸은 셈이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와 온데다 단체관광버스 순례자들이 막 도착한지라 납경소부터 들른다. 아니나다를까, 단체 순례자의 납경책을 잔뜩 걷은 가이드가 한아름 납경을 받고 있다. 짜증을 누르고 불쌍한 표정으로 서 있었더니 직원이 먼저 해주겠다고 손을 내민다. 다행이다.


단체 순례자들의 반야심경 외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어둑해져가는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어제의 그 일본인 부자 오헨로상이 헐레벌떡 산문을 오르는 게 보인다. 5시가 마감이라 분초를 다투는 것 같다. 부모님과 같이 하는 순례도 나름 의미있을 것 같다. 아들이 싱가포르 유학중이라 잠깐 다니러 온 김에 며칠 아버지와 순례길을 걷는다고 했던 게 생각난다. 그러고보니 오늘까지 걷고는 돌아갈 것 같아 인사를 건넨다. 그들도 내게 몸조심하고 순례 잘 마치라고 인사해 준다.




점심무렵 예약해 두었던 근처의 요시노료칸으로 간다.

저녁거리와 내일 도시락을 준비하려고 편의점 위치를 물어보니 한참을 내려가야 한다고, 자건거를 빌려주겠단다. 자전거를 못 배운 나, 배낭만 부려놓고 다시 길을 나선다. 편의점 가는 1km 남짓 거리가 어찌나 먼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다.

편의점에서 저녁으로 차슈가 들어간 사발라면과 맥주(노도고시라니 술술 잘 넘어가는 맥주일 듯), 내일 점심으로 먹을 도시락를 산다. 숙소로 돌아가자마자 씻고 라면에 이걸 마시고 기절하듯 잠들고 싶다.

오늘 무리해서 이틀동안 11개 사찰을 돌았으니 88개 중에서 8분의 1을 마친 셈이다.

1200km 중에서 37km 라는 거리는 오늘만큼은 잊기로 하자. 8분의 1을 마쳤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 생각하니 오늘 축하주를 아니 마실 수 없는 거다. 맥주 사오길 잘했다.





요시노료칸(조식포함) 5500엔

음료 230엔

저녁+도시락 890엔

납경(6~11번) 1800엔


도합 8420엔

이동거리 26.5km + 2km(기리하타지) + 2km(편의점)




https://brunch.co.kr/@eslee26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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