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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17. 2017

#01, 순례 시작하다

소원하던 오헨로미치에 오헨로상이 되어 하카타를 입다 (for #1~#5)

2015년 10월 14일 수요일. 기차게 맑음

  

①霊山寺(Ryōzenji) - 1.2km - ②極楽寺(Gokurakuji) - 2.5km - ③金泉寺(Konsenji) - 4.9km - ④大日寺(Dainichiji) - 2km - ⑤地蔵寺(Jizōji)  


지도책 흘리고, 길 헤매고 좌충우돌을 벗 삼아 하루를 걷다

   

첫날이라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배낭을 풀었다 싸는 데만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토요코인호텔에서 가벼운 조식 후에 13kg 배낭을 지고 기세 좋게 체크아웃했다. 지근거리인 도쿠시마역 주변이 시코쿠에선 그래도 가장 번화한 축에 속할 텐데 생각보다 복잡하지는 않다. 우리나라 지방 중소도시의 터미널이나 기차역과 많이 다르지 않은 정도!     


8시 25분에 도쿠시마역 2번 승차홈에서 료젠지까지 가는 38번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도 한산하고 여유롭다. 정류장마다 버스기사의 친절한 멘트가 계속되는 버스안에 순례 여행자는 나뿐인 듯 보인다.

버스는 9시에 료젠지 건너편에 나를 내려놓는다.

9시 정각에 1번 절부터 시작이라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도쿄나 교토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일본의 절은 도심에도 있고 산중에도 있다.

1번 절 료젠지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왕복 2차선 도로변에 접해 있다. 주위에는 평범한 주택가가 있는데 그다지 밀집되지도 않았다.     




1번 절에 들어가기에 앞서 시코쿠의 도보여행코스인 오헨로미치, 오헨로미치를 구성하는 각각의 사찰에서 참배하는 순서와 방법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시코쿠의 순례길(일본어로는 오헨로미치라고 하는)은 일본 불교 진언종의 창시자인 코보대사가 서기 800년경에 수행했던 장소를 더듬어가는 시코쿠의 88개소의 영지를 1번 료젠지부터 차례대로 88번 오오쿠보지를 거쳐 다시 1번까지 돌아오는 약 1200km의 장대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시코쿠의 4개 현 중에서 1번부터 23번까지는 동쪽의 도쿠시마현, 24번부터 39번까지는 남쪽의 고치현, 40번부터 65번까지는 서쪽의 에히메현, 66번부터 88번까지는 북쪽의 가가와현을 시계방향으로 도는 섬 일주 코스이기도 하다.

이 길을 걷는 순례자들을 가리켜 오헨로상이라고 부르고 코보대사를 오다이시상이라고도 칭하는데 오헨로미치를 걷는 동안 코보대사가 늘 함께 한다는 의미로 동행이인이라는 표현도 즐겨 사용한다.  

   

각 소의 절은 산문(山門) - 미즈야(水屋) - 종루(鐘樓) - 본당(本堂) - 대사당(大師堂) - 납경소(納經所) - 산문(山門) 순서로 참배를 해야 한다.

산문에서 한 번 절을 하고 들어와선 미즈야에서 손을 씻고 입을 헹구어 몸을 정갈하게 한 후, 종루에서 종을 치는 데 종을 치는 과정은 종종 생략되기도 한다.

본당에서 향과 촛불을 올리고 형편에 맞게 시주?도 넣은 후에 두 손을 모으고 반야심경을 외는 게 보통이지만 이교도인은 손을 모으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부처님이 아닌 코보대사를 모시는 대사당에서도 본당에서와 같은 예를 올린다.

이런 과정을 마친 후에 납경소에서 납경장에 도장을 받는 데 비용은 모든 절마다 300엔씩 일률적으로 받고 있다.

참배를 마치고 산문을 돌아 나올 때에도 한 번의 절을 올린다.



    

료젠지가 1번 절이어선지 많은 참배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절 마당의 연못에는 화려한 잉어들이 유영하고, 본당으로 가는 다리가 놓여 있다. 그 주위로 오밀조밀하게 석탑, 불상, 동자승 등으로 꾸며져 있고 연못 좌측으로 열 셋의 불상의 나열하듯 서 있다.     


오헨로용품도 오헨로상과 궁합이 맞는 건 따로 있단다


보통 시작점인 료젠지에서 오헨로용품을 구비하게 되는데 오랜 경험자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료젠지에서는 납경책만 구입하고 나머지 용품들은 그 이후의 절에서 구입하는 게 더 저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순례자들을 벤치마킹해서 본인에게 적절한 물품을 사게 되므로 효율적이라고 한다. 실제로 스게가사가 불편해서 새로이 구입하는 오헨로상도 만났더랬다.


하지만 나의 경우 오헨로상의 모든 격식을 다 차릴 건 아니므로 이곳에서 꼭 필요한 물품만 사기로 한다.

납경책, 한글 지도책(나중엔 좀 후회스러웠음. 일본어 지도책도 괜찮을 듯. 왜냐면 한글판은 개정을 한 번도 안 해서 숙소 정보가 업데이트 안되어 있음. 휴업이나 폐업된 숙소가 많음), 백색 상의인 하카타와 순례자용 명함인 오사메후다만 구입을 하는 걸로.     

모자인 스게가사는 미모를 헤칠뿐더러 촉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기능성 모자로 대신하고, 지팡이도 오히려 짐이 될 것 같아 사양한다. 이외에도 염주나 목에 거는 와게사는 너무 불교적인 색채라서 이교도인 나에겐 적절치 않아 역시 생략하기로 한다.     

료젠지의 납경소는 거대한 상점인데다 납경은 미리 납경책에 써져 있는 건지 인쇄가 되어 있는 건지 잘 분간은 안되지만 비용만은 300엔까지 추가로, 하카타에 적힌 뜻 모를 붓글씨 비용까지도 부담을 해야 한단다.

오헨로용품 일체를 구입하는 데만도 2~3만엔은 훌쩍 들어가지만 납경책, 한글 지도책, 하카타, 오사메후다까지 최소한으로 하니 10390엔이 소요된다.   

  




비로소 걷기 시작하는 2번 절 고쿠라쿠지로 향하는 길이 이쁘다.

담자락에 꽈리처럼 생긴 꽃이 못 보던 거여서 무거운 배낭을 내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어본다.

벌써부터 배낭을 내렸다 메는 것, 앉았다 일어나는 것조차 부자연스럽게 힘이 든다. 이러다 사진을 포기하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1km쯤을 걸어 고쿠라쿠지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그 와중에 한글 지도책이 보이질 않는 거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꽃을 촬영하면서 내려놓았던 듯 싶다. 에고~ 2천엔짜리 책을 사자마자 잃어버리다니, 그냥 2번 절에서 다시 살까 고민은 잠시, 거리가 멀지 않으니 돌아가 보기로 한다.

이 놈이 그 요물!

무거운 배낭은 2번 절집 상점에 잠시 맡기고 헐레벌떡 돌아가보니 아니나다를까 지도책이 꽃을 촬영했던 담자락 아래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반갑기도 하지.

일본인들 성격상 남의 물건을 집어갈 리도 없고, 한국어로 된 지도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 역시 찾으러 오길 잘했다 싶다. 첫날부터 정신줄을 놓았었지만 이걸 액땜이라 여기고 타산지석 삼아 앞으로는 더 조심할 수 밖에.


고쿠라쿠지(極楽寺)에서는 빨간 천에 소원을 적어 매듭으로 무수히 매달려 있는 것들에 시선이 갔다.

절의 이름처럼 극락왕생이라도 빌었던 걸까, 아니면 각각의  염원으로 두 손을 모았을 다른 사연들이 있었던 걸까. 그 간절함에 가슴이 짠해진다.


나는 이 길에서 무엇을 소원하게 될까.

아님 무엇을 내려놓게 될까.






3번 곤센지까지도 금방이다.

첫날이라 워밍업삼아 5번 절까지만 돌기로 한 터라 여유를 부리면서 느릿느릿 배낭에 몸을 맡긴다. 어디가 불편한지 초반부에 잘 살펴야 탈나는 걸 예방할 수 있을테니 일단은 몸이 말하게 내버려두자는 심정으로 무게가 익숙해지도록 적응시켜가며 천천히 걷는다.

오헨로미치에 사람 수는 점점 줄어드는 데 익숙한 얼굴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1번 절에서도, 2번 절에서도 보았던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지나쳐 간다. 초반부라서 아직은 다들 쌩쌩하다.

예상 밖인 건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이 드물다는 정도, 일본인이 90% 이상이고 비교적 연세가 드신 분들이 많아 보인다. 노부부들도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신기하고, 짐들이 다들 조그마해서 또 신기하다. 설마 완주할 계획이 아닌 거겠지. 완주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저 안에 다 들어갈 리가 없어. 그렇게 짐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곤센지(金泉寺)라, 금이 샘솟는 다니 재력에 영험이 있는 절일까.

공손히 두 손을 모으게 하는 위력이 있다.




4번 다이니치지까지는 약 5km, 한 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도중에 오른쪽으로 꺾어져야 하는 길을 지나쳐서 5번 지죠지 근처로 오고 말았다. 길치, 방향치의 특색이 첫날부터 살아나는 건지 참. 앞길은 먼데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무색하게 좌충우돌하고 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그래도 잘못 온 김에 오늘 묵기로 예약한 숙소인 모리모토야 민슈쿠 근처까지 왔으니 젖은 솜뭉치같이 어깨를 눌러오는 배낭부터 맡기기로 한다. 보조 배낭에 카메라와 납경책만 달랑 넣어서 나오는 길이 얼마나 가벼운지!

5번 절은 다시 돌아와서 들르기로 하고 4번 다이니치지로 향하는데 외진 길가의 가을꽃과 감나무의 과실들이 따뜻한 오후 빛을 받아 너무 이쁘다. 준비해 온 가을 소품을 걸쳐서 셔터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이니치지 가는 길에 얼굴을 익힌 일본인 부자지간 오헨로상을 만난다. 그들은 다이니치지를 마치고 나오는 길인지 아직도 초입에서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내가 의외였나 보다.

왜 아직도 여기까지냐고 해서 길을 잘 못 들어 5번 절로 오고 말았다니, 물어보지도 않았는 데 다이니치지로 가는 길을 세세하게 일러 준다. 한국에서 온 어리버리해 보이는 내가 무척 염려되는가 보다.


우여곡절 끝에 살짝 외진 다이니치지에 도착했다. 이제 겨우 네 번째 절인데, 앞으로 84개가 더 남았는데 모든 절들이 외양은 달라도 다 비슷해 보이고, 참배는 약식으로 네 번 손을 모으는 걸로 대신하고, 납경소에서 납경받는 일이 최우선이다. 꽝꽝꽝 빨갛게 찍히는 절의 인장들, 왼쪽 상단에 한자로 四国苐O番의 번호와 중앙의 절을 형상화한 문양,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는 절의 인장이 한꺼번에 찍히는 것 같다. 그러고는 손수 붓글씨로 휙휙 세 줄의 세로 글씨를 써주는데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참으로 멋스럽다. 먹물은 사서 쓰는 지 먹물 내음은 나지 않지만 오랜만에 보는 붓글씨 쓰는 모습이 어찌 보면 절 자체보다도 더 외경스럽다.




5번 지죠지까지 돌아보아도 절 자체는 우리나라의 절이 훨씬 더 고풍스럽고 종교적으로 다가오는 건 일본한테 마음을 내어주기 싫음일까.

그래도 지죠지의 몇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아직 물들지 않아서 많이 아쉬울만큼 멋스럽다.


너무 여유를 부린 일정인 지, 사진찍으며 반나절은 놀았어도 4시에 일과를 마친다.

그러고보니 배도 안고파서 점심도 거른 채로 생수 한 병 사마신 게 전부다. 아마도 긴장한 탓일게다.



10월 중순인데도 시코쿠는 아직 한여름이다.

모리모토야 민슈쿠에서 땀에 절은 옷가지를 세탁기에 돌리고 욕조에 든다.

온 몸이 나른해지는 기분좋은 해방감이 몰려온다.


도쿄에서 교토에서 오사카에서 비지니스 호텔이나 게스트하우스, 더러는 전통 료칸에 묵으면서 온천욕에 가이세키 요리를 즐긴 적은 있어도 일본에서 민박을 한 적은 없었기에 어떠할지 궁금했었는 데 모리모토야 민슈쿠 나쁘지 않다.

혼자 쓰기엔 과분하게 넓은 다다미방에 빠삭빠삭한 이부자리와 유카타, 무료 세탁 서비스, 청결한 복도, 욕실, 공동 식당까지 거슬리는 건 없어 보인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각에 벌써 반가운 저녁 식사다.

살짝 숙성시킨 생선회 몇점에 두부를 섞어 만든 덴뿌라 튀김, 감자 샐러드, 연근 볶음, 일본 특유의 저림 야채 두 가지에 밥과 맑은 버섯 국, 후식으로 단감 두 점이 올라 있다.

날마다 이렇게만 먹으면 저절로 건강해질 것 같은 밥상이다.

종일 걸은 순례자를 위해 밥은 무한 리필이란다.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간이 세지 않은 저녁 식사를 천천히 깨끗하게 비운다.

가난한 순례자이니만큼 먹을 수 있을 때 사양하지 않고 비축해 둘 것! 이런 게 생존 본능이지.


저녁과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두 끼를 제공하는 숙박비용이 6500엔. 가격까지 착하다.




걷는 일정에 대한 준비없이 첫 날 숙소만 예약하고 온 터라 이래저래 궁리할 게 많다.

도쿠시마현에서는 비교적 절들이 가깝게 붙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하루하루 몇 번까지 마쳐야 할지 짐작하기가 어렵다.

내일은 오늘보다는 좀 더 걸어봐야겠기에 10번 기리하타지까지 15km 정도면 어쩔까 싶지만 일단은 내일 걸으면서 결정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떠나오기 전에는 12시 전에 잠들어 본 적이 없고 아침엔 8시 가까워서야 겨우겨우 일어났는데 이 곳에선 10시 전 취침, 5시 기상이 생활화될 듯 싶다.

내 생애 이렇게 바른 생활이었던 적이 있기라도 했나.

내친 김에 몸과 마음도 정화하고, 덤으로 다이어트까지 얻어가야겠다.




- 버스(도쿠시마역-료젠지) 400엔

- 납경(1~5번) 1500엔

- 헨로용품 10390엔

- 음료 130엔

- 모리모토야(2식) 6500엔


  도합 18920엔 

  약 10km 도보

1번부터 5번 절까지의 납경 그리고 절을 형상화한 스가타




1. https://brunch.co.kr/@eslee2662/1

2. https://brunch.co.kr/@eslee2662/2


3. https://brunch.co.kr/@eslee26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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